엄벌주의로 쪼그라든 사회
‘정인이 사건’(이하 ‘양천아동학대사건’) 가해자들의 공판기일에 몰려든 시민들은 분노를 표출하며 말했다. “아동학대에 대해서는 관대한 처벌 말고 형량을 강화해서 엄벌주의로 나가야 한다.”
예외적인 모습이 아니다. 사회적 주목도가 높은 사건이 발생하면, 국회는 처벌수위를 높이는 법안을 발의하며 ‘방지법’, ‘예방법’ 등의 이름을 붙인다.
양천아동학대사건에 대한 여론이 뜨거워지자, 정당들은 며칠 만에 처벌 강화와 가해자 신상 공개를 골자로 하는 법률안들을 발표했다. 더 세게 처벌하고, 가해자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면 아동학대를 막을 수 있다면서 말이다.
‘엄벌주의’를, 사회문제를 형사처벌로써 대응하고 처벌수위를 높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식과 정책이라고 정의한다면, 한국 사회는 엄벌주의가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거나 해결되지 않는 것은 ‘강한 처벌’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런 사회에서 사회문제는 납작해진다. 언론은 가해자에게 초점을 맞춰 그들의 신상과 범죄행위를 보도하고, 시민들은 가해자에게 분노하며 높은 처벌을 요구한다. 국회는 이에 호응하며 법정형을 높이는 법안을 발의한다. 결국 법원의 징역 몇 년 판결로 사회적 관심과 공분은 사그라든다. 솜방망이 처벌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남을 뿐이다.
사회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네 가지 측면이 있다. 진실규명, 책임자에 대한 책임추궁, 피해회복, 그리고 재발방지를 위한 인식과 제도 변화. 네 측면은 분리할 수 없다. 온전한 진실을 규명해야 누가 책임이 있는지, 어떤 피해가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있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만 있고, 피해자에 대한 조치가 없다면 문제를 해결했다 말할 수 없다. 문제를 초래한 구조를 바꾸는 대책이 없는 해결은 해결이 아니다. 이 각각의 측면을 위해서는 상당한 예산과 시간이 든다.
엄벌주의의 문제는 이 네 가지 중 가해자 처벌이 과잉 부각되면서 다른 측면들을 간과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강한 처벌 이외에 다른 측면들은 주목받지 못하고, 당연하게도 예산과 시간도 투여되지 않는다. 가해자만 강하게 처벌하면, 진실규명도 피해회복도 재발방지도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형량을 높이는 간단한 방법으로, 사회문제는 해결 완료이다. 사회의 기능이 처벌에만 맞춰지면서, 모든 문제의 판단과 해결 주체는 검찰과 법원으로 귀결된다. 사회가 쪼그라드는 과정이다.
처벌만 이루어지면 되는가? 가해자 처벌을 위해 확인되는 실체란, 문제가 발생한 총체적 과정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양천아동학대사건만 하여도, 재판에서는 양부모의 직접적 학대행위만을 다룰 뿐이다. 입양 과정 및 사후 점검, 3번의 학대신고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문제 등은 형사처벌 절차에서 다뤄지지 않는다. 이 진실은 지금 어느 기관이 어떻게 밝히고 있는가? 진실규명 절차가 없는데 제대로 된 재발방지 대책이 가능한가? 양천아동학대사건의 가해자들에게 살인죄로 무거운 형량이 선고되면, 매년 수십건에 달하는 아동학대 사망사건이 없어지는가? 범죄자는 자신의 형량을 면밀히 고려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한 가지 분명히 하자. 아동학대 가해자에 대한 합당한 처벌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뿐만 아니다. 안전의무를 위반해 중대재해를 일으킨 기업 관련자들에 대해 무거운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 디지털 성착취 범죄자들에게 관대했던 양형도 바뀌어야 한다. 처벌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처벌만으로는 문제가 제대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동인권 단체들의 노력으로 지난 5일 ‘양천아동학대사망사건 등 진상조사 및 아동학대 근절대책 마련 등을 위한 특별법안’이 발의되었다. 대통령 산하에 위원회를 만들어 2018년부터 현재까지 발생한 아동학대 사망사건 중 중대 사건들을 조사하고, 학대 근절 대책을 포함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골자이다. 돈과 시간을 들여 진실을 규명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만들자는 것이다.
오랜 시간 아동학대 사건을 다루고, 학대를 근절하기 위해 노력했던 단체들은 양천아동학대사건 직후 국회에서 등장했던 형량 강화와 신상공개 법안들에 반대했다. 처벌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즉자적인 대응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여론의 관심은 크지 않다. 이 법안의 제안 이유에는 “양천아동사건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남아 있는 이 시점”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남아 있는”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슬프다. 우리 사회의 공분이 처벌에만 머무는 한 아이들은 계속 죽어갈 수밖에 없다.
| 임재성 변호사·사회학자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84336.html#csidx5150964f2bc44b29db3aeb9403a3a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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