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은 우리 시대의 십자가다”
미국을 국빈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출국 직전 <워싱턴 포스트> 인터뷰에서 대형 사고를 쳤다. 윤석열 대통령이 정확히 뭐라고 말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말은 생각이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정말 100년 전의 일들을 가지고 지금 유럽에서는 전쟁을 몇 번씩 겪고 그 참혹한 전쟁을 겪어도 미래를 위해서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하는데 100년 전의 일을 가지고 무조건 안 된다 무조건 무릎 꿇어라라고 하는 이거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신문에서 본 정계 원로가 다음날 아침 전화로 이렇게 말했다.
“100년 전 일이라니. 이럴 수가 있는가. 윤석열 대통령 정신이 있긴 있는 것인가. 일본이 우리를 강점하는 바람에 우리는 나라를 빼앗겼고 오늘도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 이게 지금의 문제지, 왜 100년 전의 문제인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해서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였다. 원로의 말이 옳다.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역사의식이 없다는 증거다.
뒤이은 발언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대통령실 해외홍보비서관실에서 공개한 내용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설득에 있어서는 저는 충분히 했다고 봅니다. (저는 선거 때 국민들한테 이걸 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는데 선거에서 이겼으니 자신의 결단이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일부 비판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을 결코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도 했다고 <워싱턴 포스트>가 보도했다.
역사의식이 없는 자신의 무지를 결단이라고 우기고, 그런 무지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무지하다고 몰아붙이는 셈이다.
아무리 대통령이지만 오만하기 그지없다.
이러한 인식과 발언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다.
해외홍보비서관실은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나온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 의회 연설에서 ‘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강조한 것과 동일한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일본에는 과거를 직시하고 역사를 두렵게 여기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고, 한국은 일본의 변화된 모습을 올바르게 평가하면서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맥락이 전혀 다르다. 지금 일본은 과거를 직시하지 않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사고는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더욱 힘을 실어줄 것 같다. 불행한 일이다.
‘촛불 행동’은 윤석열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를 매 주말 이어가고 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매주 월요일 전국 각 교구를 돌며 ‘친일매국 검찰 독재 정권 퇴진과 주권 회복을 위한 월요 시국 기도회’를 하고 있다.
그래도 나라를 걱정하는 원로들은 생각이 좀 다른 것 같다. 지난 4월15일 공개된 <피렌체의 식탁>에서 함세웅 신부와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이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함세웅 신부: “대만의 해방신학자 송천성(쑹취안성) 목사님은 ‘부활은 고통의 수락이다. 십자가를 껴안는 게 부활이다’라고 설명했어요. 제가 세미나 때 신학생과 그 대목을 묵상하며 ‘아, 그렇구나. 부활은 우리가 있는 현실을 그대로 껴안는 것이구나. 민족사, 개인사, 가정사 모두…’라고 깨달았어요. 그래서 제가 청년들 앞에서 대화할 때 ‘윤석열 대통령은 우리 시대의 십자가다. 우리 손으로 뽑았는데 5년간 짊어지고 가자. 골고다를 넘어 부활로 가자’고 외쳤더니 청년들이 조금은 깨닫더라고요.”
박지원 전 원장: “제가 ‘어떤 경우에도 헌정 중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선거는 치열하게 하더라도 당선된 대통령의 성공을 위해 협력할 것은 해야 한다. 그것이 김대중의 행동하는 양심, 노무현의 깨어있는 시민 정신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다 첨언하겠습니다. 함 신부님도 ‘윤석열 대통령이 우리의 십자가니까 메고 가자. 절대 헌정 중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다. 그렇게 이해해도 되겠죠?”
그리스도교에는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십자가의 길’이 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까지 각각의 의미를 지닌 14개 지점을 지나며 기도하는 것이다.
함세웅 신부의 비유를 따르면, 이제 겨우 2지점을 통과했을 뿐이다. 갈 길이 멀다.
성한용ㅣ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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