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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하면 ‘불공정’ 딱지, 방심위는 공정한가

道雨 2024. 2. 8. 09:23

툭하면 ‘불공정’ 딱지, 방심위는 공정한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일컬어 흔히 ‘민간 독립기구’라고 한다. ‘합의제 기구’라고도 한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 말들이 허울일 뿐이라는 것을.

8일로 출범 5개월째를 맞는 ‘류희림 방심위’ 체제는 똑똑히 보여줬다.

방심위가 정치권력에 예속되어 ‘국가검열기구’로 전락했으며, 위원장이 소수 의견은 철저히 배제한 채 사실상 ‘언론 사정기관’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방심위는 2008년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를 통합한 방송통신위원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그해 초 제정된 방통위 설치법 발의안에는 ‘방송·통신의 내용 심의 기능은 방통위로부터 분리해 민간 독립기구로 설치할 필요성이 제기됨’이라는 문구가 들어 있다. ‘대통령 소속 행정기관’인 방통위가 방송·통신의 내용을 직접 심의할 경우 검열 논란에 휘말릴 수 있으니 별도의 심의 전담 기구를 만들자는 취지다. 그 ‘민간 독립기구’가 바로 방심위다.

방통위법의 방심위 설치 조항에 ‘독립적으로 사무를 수행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방통위원과 달리 방심위원은 ‘위촉’하도록 한 것은 ‘민간 독립기구’라는 입법 취지를 염두에 둔 조처로 봐야 한다.

 

방심위의 독립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하다. 방심위 업무인 ‘내용 심의’가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방심위가 예나 지금이나 민간 기구임을 유독 강조하는 것도 독립성의 외관을 갖추기 위해서다. 그러나 지금껏 방심위가 정치권력에서 자유로운 적은 거의 없었다.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에는 법정제재로 재갈을 물리고, 우호적인 언론은 봐주기 심의를 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작금의 류희림 체제는 도가 지나치다. 전례 없이 퇴행적이고 폭압적이다. 오죽하면 방심위의 산증인인 사무처 직원들이 ‘집단 항명’에 나섰겠나.

 

류희림 방심위의 정치적 편향성은 지난해 1년간의 심의 현황만 봐도 알 수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위촉된 야권 위원이 다수이던 1~2분기에는 법정제재 건수가 지상파 3건, 종편·보도채널 2건에 그쳤다. 그러나 여권 우위로 재편된 3~4분기에는 지상파 27건, 종편·보도채널 1건의 법정제재가 나왔다. 건수도 크게 늘었지만, 지상파에 법정제재가 집중되고 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정부·여당이 지상파인 한국방송(KBS)과 문화방송(MBC)을 ‘민주노총 방송’ ‘편파 방송’이라고 줄곧 공격해온 걸 생각하면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방심위는 여러명의 위원이 토론을 거쳐 심의·의결하는 합의제 기구다. 그러나 의견 조율을 통한 합리적인 결론 도출이라는 합의제 정신은 사라지고, 다수결로 제재를 밀어붙이는 경우가 다반사다.

마치 짬짜미를 한 듯 여권 위원들은 똑같은 수위의 중징계(법정제재)를 주장하고, 야권 위원들은 ‘문제없음’이나 경징계(행정지도) 의견을 내는 일이 되풀이된다.

 

방심위 누리집에 공개된 심의의결서를 보면, 류희림 방심위가 출범한 이후인 지난해 9월11일부터 12월18일까지 지상파와 종편·보도채널에 대해 모두 25건의 의결이 이뤄졌는데, 전원 합의로 결정된 사안은 3건에 그쳤다. 3건 모두 정치적 논란의 여지가 없는 광고 관련 제재였다.

전체의 76%에 이르는 ‘공정성’ 관련 심의에선 예외 없이 4 대 3 또는 4 대 1로 의견이 갈렸다. 여권 위원 4명이 서로 다른 수위의 징계 의견을 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방심위가 비판적인 언론을 옥죄는 데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드는 것이 공정성 기준이다. 공정성 여부는 자의적 해석의 여지가 큰 탓에 정치적으로 남용되기 쉽다. 여권은 정부·여당에 불리한 보도를 ‘불공정 보도’로 낙인찍곤 한다. 무엇보다 편향적으로(여야 6 대 3 추천) 구성된 방심위가 공정성 심의를 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공정성은 모든 언론이 추구해야 할 가치다. 그러나 국가가 공정성을 잣대로 언론을 재단하고 처벌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아무리 좋은 말을 갖다 붙여도 검열로 귀결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민주주의 선진국 가운데 한국처럼 국가가 시사·보도 프로그램을 건건이 심의하고 제재하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민간기구’의 탈을 쓴 ‘국가검열기구’가 되어버린 방심위의 대수술이 필요하다.

수술의 방향은 방심위가 지난해 말 펴낸 연구용역 보고서(‘해외 시사·보도 프로그램에 대한 내용규제 현황 연구’)에 담겨 있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국가에서 시사·보도 프로그램에 대한 행정제재는 명백한 법률 위반일 경우로 한정되며, 뉴스의 진실성에 관한 판단은 저널리즘의 영역이므로 자율규제가 원칙이라는 것이 보고서의 결론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늘 강조해 마지않는 ‘글로벌 스탠더드’란 바로 이런 거다.

 

 

이종규 | 저널리즘책무실장·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