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관련 280

신라 대원신통의 계승자, 색공녀 미실

신라 대원신통의 계승자, 색공녀 미실 미실(美室, 546/548 ~ 612년 경)은 필사본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신라 시대의 권력자이며, 대원신통(大元神統)의 계승자였다. 혈통 필사본 《화랑세기》는 미실의 아버지가 제2대 풍월주 미진부(未珍夫)이며, 미진부의 아버지는 아시공이며, 아시공의 아버지는 선모라고 부계를 밝히고 있다. 미진부는 아시공과 삼엽공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삼엽공주는 법흥왕과 그의 후궁 벽화부인(碧花夫人)의 딸이다. 벽화는 파로(波路)와 벽아부인(碧我)의 딸이며, 벽아가 섬신공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위화랑(魏花郞)이다. 위화랑은 초대 풍월주이자, 소지마립간의 마복자로, 4대 풍월주 이화랑의 아버지이며, 오도(吾道)와의 사이에서는 옥진(玉珍)과 금진(金珍) 등의 딸을 낳았다. ..

조선시대 성리학(주자학)과 기타 학자들의 학통과 계보

조선시대 성리학(주자학)과 기타 학자들의 학통과 계보 * 성리학(주자학) 계보 : 안향-안향의 6군자-이제현-이곡-이색-정몽주-길재, 권근 - 조선 성리학의 정통 계보는 이색, 정몽주, 길재가 시발점. * 이색의 가계 : 한산 이씨. 아버지는 성리학맥에 있어 이제현의 뒤를 이었다고 평가받는 이곡(李穀)이다. 세조와 함께 계유정난에 참가해 정난공신에,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등을 숙청하고 세조를 즉위시켜 좌익공신까지 오른 이계전과 이계린이 이색의 손자다. 손자인 이맹균(1371~1440)은 세종대왕 치하에서 세자인 이향(뒤에 문종)까지 가르치던 스승이었으며 좌찬성까지 올랐으나, 여종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이를 안 부인 이씨가 그 여종을 굶기고 때려죽이게 했다. 그러자 이맹균은 여종이 잘못하여 아내가 때려..

조선시대 인물들의 호(號) 사전

조선시대 인물들의 호(號) 사전 * 강세황 : 표암(豹菴), 표옹(豹翁) : “어려서부터 등에 ‘표범’처럼 흰 얼룩무늬가 있어서, 스스로 장난삼아 그렇게 호를 지었다.” 「표옹자지(豹翁自誌)」 김홍도의 스승. 문사(文士)였지만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고 불렸던 문인화가였다. * 강희맹 : 사숙재(私淑齋) : ‘사숙(私淑)’이란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를 흠모해 홀로 그 학문과 도리를 배우고 익혔다’는 의미임. 맹자는 공자가 이미 사망한 후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의 학문은 공자를 사숙하면서 이룬 것’이라고 말함. 『맹자』 「이루하(離婁下)」편. 강희맹은 자신이 오직 성인을 본받아 학문을 익혔다는 사실을 말하거나, 자신의 학문과 예술은 홀로 터득한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냄...

김노경 사건(윤상도 옥사 사건)

김노경 사건(윤상도 옥사 사건) ​[개요] 윤상도는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서 과거에 급제하여, 종6품 부사과(副司果)에 승진했다. 1830년 윤상도와 윤한모 부자는, 효명세자의 무능과 정2품 호조판서 박종훈, 종2품 어영대장 유상량, 종2품 유수를 역임한 신위 등, 탐관오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윤상도와 윤한모 부자는 군신을 이간질하고, 반란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전라도 추자도로 유배됐고, 1840년 김홍근의 상소(윤상도 옥사 재조사)로 유배지에서 다시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고는 아들 윤한모와 함께 능지처참 되었다. 김노경은 1830년 윤상도의 배후조종자로, 전라도 고금도로 유배되었다가, 1834년 순조의 배려로 해배됐다. 1837년(헌종 3)에 사망했다. 1840년 김홍근의 상소(윤상도..

청장관 이덕무와 초정 박제가

청장관 이덕무와 초정 박제가 - ‘기호(記號)’와 ‘소전(小傳)’, 글로 그린 자화상 # 백탑파(白塔派)와 백탑시사(白塔詩社) 북학파의 1세대를 이끈 사람이 박지원과 홍대용이라면, 북학파의 2세대를 주도한 인물은 청장관(靑莊館) 이덕무와 초정(楚亭) 박제가였다. 특히 북학파의 2세대 그룹을 가리켜 ‘백탑파(白塔派)’라고도 하는데, 그 까닭은 이들이 현재 종로2가 탑골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는 백탑(白塔,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중심으로 모여 살면서 학문적·문학적 교류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박제가는 ‘백탑에서의 맑은 인연’이라는 뜻을 담아 『백탑청연집(白塔淸緣集)』을 저술하였고, 그 서문(序文)에 그렇게 제목을 붙인 사유와 자신들의 생활과 활동 상황 등을 적었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일찍이 유득공, 이서구 ..

홍재 정조 이산

홍재 정조 이산 - ‘임금은 모든 신하와 백성의 스승‘이라는 군사(君師)라고 자처한 제왕 # 홍재(弘齋) : “군자는 도량이 넓어야 한다!” 조선에서 임금은 제왕인 동시에 한 사람의 유학자였기 때문에, 호를 지어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선비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호학군주(好學君主)였던 정조는 스스로 다양한 호를 지어 자신의 뜻과 철학을 세상에 드러냈다. 홍재(弘齋),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홍우일인재(弘于一人齋) 등, 정조가 남긴 호는 다른 어떤 선비들의 호보다 독특하고 다채롭다. 정조는 임금이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학자에서 찾았던 사람이다. 정조가 가장 먼저 사용한 호는 왕세손 시절 자신이 거처하던 동궁의 연침(燕寢, 침소 혹은 침전)에 이름붙인 ‘홍재(弘齋)’였다. ..

연암 박지원과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과 담헌 홍대용 - 북학파의 비조(鼻祖) # 박지원과 홍대용의 도의지교(道義之交)와 북학파 18세기 조선의 문예 부흥과 지식 혁명을 이끈 두 개의 재야 지식인 그룹이 있었다. 그 하나가 성호 이익에게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학문을 배우고 사상의 영향을 받은 성호학파라면, 다른 하나는 연암(燕巖) 박지원과 담헌(湛軒) 홍대용을 비조(鼻祖, 시조)로 하여 사제(師弟) 혹은 사우(師友) 관계를 형성한 북학파라고 할 수 있다. 북학파는 자신들이 추구했던 신학문과 지식 경향을 가리켜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경세치용학(經世致用學)·경세제민학(經世濟民學)·경세제국학(經世濟國學)·명물도수학(名物度數學)‘이라고 불렀다. ‘이용후생학’이란 나라 경제와 백성의 삶을 이롭게 하는 실용적인 지식과 기술 및 생활 도..

성호 이익과 순암 안정복

성호 이익과 순암 안정복 - 실학의 산실(産室), ‘성호학파’ # 지식 혁명, 학문과 지식에 대한 사고의 대전환(大轉換) 역사에는 일세(一世)를 지배하는 시대적 추세와 정신 사조가 있다. 율곡 이이가 산 16세기를 ‘사림의 시대’, 우암 송시열이 산 17세기를 ‘보수의 시대’라고 표현한다. 18세기는 ‘혁신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100년 동안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 등 모든 방면에서 최대의 화두는 단연 개혁(改革) 혹은 혁신(革新)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조선은 가히 ‘지식 혁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기존의 학문과 지식에 대한 사고의 대전환이 일어났다. 성리학(주자학)만이 유일한 가치이자 학문이라고 여겼던 전통적인 개념의 지식인(사대부)들이, 중인 이하의 계층이나 배우고 다루는 ..

김만중(金萬重)

김만중(金萬重) - 1637(인조 15) 한성에서 출생, 1692(숙종 18) 남해 유배지에서 사망.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숙(重淑),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자이자, 김집(金集)의 손자이다. 아버지 익겸은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청음 김상헌의 형)을 따라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유복자로 태어났다. 1665년(현종 6)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언·부수찬이 되고, 헌납·사서 등을 거쳤다. 1679년(숙종 5)에 다시 등용되어 대제학·대사헌에 이르렀으나, 1687년(숙종 13) 경연에서 장숙의 일가를 둘러싼 언사로 인해 선천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왕자(후에 경종)의 탄생으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게 되자, 그도..

반계 유형원과 잠곡 김육

반계 유형원과 잠곡 김육 - 개혁을 설계한 땅, 부안 우반동과 가평 잠곡 # 반계(磻溪) : 우반동에서 조선 최고의 개혁서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저술하다 전북 부안 변산(邊山)에 위치한 우반동(愚磻洞)은, 허균이 일찍이 마음을 빼앗겨 정착하려 했을 만큼, 아름다운 산수와 풍요로운 물산을 자랑하는 곳이다. 허균은 1608년(선조 41, 나이 40세) 가을에 관직에서 해임되자, 정사암(靜思庵)이 있던 곳에 집터를 잡아 중수하고, 생계를 연명할 약간의 전장(田莊)까지 갖추었다. ‘정사암중수기(靜思庵重修記)’에 기록. 조정 관료와 사대부들은 허균의 기이하고 파격적인 행동을 탐탁하지 않게 여겼고, 1609년 1월, 허균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해 우반동에서 한양으로 불러 올린 다음, 명나라로 보내버렸다. 명..

우암 송시열과 백호 윤휴

우암 송시열과 백호 윤휴 - 조선의 주자 vs 사문난적 # 보수의 세기, 주자학의 광기(狂氣) 조선의 유학사를 말할 때, 대개 율곡 이이의 학통은 사계(沙溪) 김장생 → 신독재(愼獨齋) 김집 →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 우암(尤庵) 송시열로 전승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율곡은 ‘경장(更張)’과 ‘안민(安民)’을 정치의 최우선적 가치로 여긴 개혁적 성향의 성리학자였던 반면, 김장생 이후 김집과 송시열에 이르기까지 서인(특히 노론 계열) 세력은 ‘신분 질서’와 ‘춘추의리(春秋義理, 중화를 숭상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를 정치와 사상의 최고 가치로 삼은 보수적 성향의 주자학자였다. 율곡의 성리학 사상과 정치 철학이 집약되어 있는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살펴보면, 그는 시무(時務)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마땅히..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 - 땅끝 마을 해남에서 꽃피운 예술혼 # 고산(孤山) : ‘외롭게 홀로 서 있는 산’과 같은 삶. ‘사림의 전성시대’였던 16세기에 영남사림이 도학(道學, 성리학) 연구에 힘을 쏟았던 반면, 호남사림은 문학 방면에서 큰 재능을 발휘했다. 17세기에 들어와 또 한 명의 걸출한 스타 시인을 배출하였는데, 바로 고산(孤山) 윤선도이다.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는, 한문(漢文)이 ‘보편 문자’였던 시대에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빛낸,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할 수 있다. 윤선도는 특별히 ‘자연미의 시인’이라고도 하는데, 윤선도의 작품들이 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는 것과 더불어, 그 언어와 리듬이 지극히 부드럽고 서정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윤선도는 사대부의 주류 문화였던 한시(漢詩..

교산 허균과 죽도 정여립

교산 허균과 죽도 정여립 - 만민평등과 천하공물을 부르짖은 두 혁명가 # 교산(蛟山) : 이무기의 꿈 허균을 대표하는 호는 ‘교산(蛟山)’인데, 그가 태어난 강릉 외가의 뒷산 이름이 교산이다. 오대산 줄기가 바다를 향해 이무기처럼 기어가는 듯한 형세를 취하고 있는 교산 아래에 허균의 외가 터가 자리잡고 있다. 허균의 외가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1561년(명종 16) 어느 가을날, 이무기가 교산 아래에 있던 큰 바윗돌을 깨뜨리고 사라졌는데, 이때 두 동강 난 바위에 문처럼 구멍이 뚫려서 교문암(蛟門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허균의 삶을 추적해 볼 때, 교산이라는 그의 호는 단순히 지명을 취한 것이 아니라 ‘이무기의 정기’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지은 「애일당기(愛日堂記)」에서, ..

조선시대 당파와 당쟁(붕당정치)

조선시대 당파와 당쟁(붕당정치) 고려 말기에 혁명파와 온건개혁파로 양분되었던 사대부 계층은, 조선이 개국한 뒤 양반 관료 체제를 구성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훈구파와 사림파로 갈라지기도 했다. 사림파가 완전히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는 정국 상황과 이해관계에 따라 여러 당파로 분열을 거듭하며, 붕당정치로 들어가게 되었다. 1. 훈구파와 사림파 가. 훈구파 관학파라고도 한다. 훈신(勳臣)·훈구대신·훈구공신 등의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조선 초기 세조의 집권을 도와 공신이 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후 형성된 집권 정치세력이었다. 이들은 세조의 측근으로 등장하여, 그 이후 몇 차례의 정치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존재했는데, 이는 정치변동 과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공신으로 책봉되었기..

화담 서경덕과 토정 이지함

화담 서경덕과 토정 이지함 - 송도삼절과 최초의 양반 상인 # 화담(花潭) : 봄이 되면 바위틈 철쭉꽃이 만발하여 붉게 비추는 ‘꽃 못’ 박연 폭포와 황진이, 서경덕을 일컬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이덕무가 한중일의 한시(漢詩)들을 모아 엮은 시화집(詩話集)인 『청비록(淸脾錄)』과 이긍익의 역사서인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서경덕의 인품과 절행(節行)을 사모했던 황진이가 그를 추앙하는 마음으로 박연 폭포와 자신을 포함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는 말을 지었다. 서경덕은 세상의 명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화담(花潭) 가 조그마한 초가집에 거처하며, 지극히 단순하면서 소박한 삶을 살았다. 또한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은 채, 간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