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사성 선생과 청백리
단원(檀園) 선생이 그린 경작도(耕作圖)란 그림을 본 적이 계세요? 없다고요. 그렇다면 1996년 초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 기념 특별전’을 관람하시지 않으셨군요. 사는 것이 아무리 바빠도 몇 군데의 전시회는 꼭 찾아보는 문화적 취미를 키워보세요. 사는 맛이 달라요. 어디에 맛있는 별미가 있다면 기를 쓰고 찾아가면서 정작 예술 혼이 질펀한 전시회는 파리만 날리는 경우가 흔해요. 밥만 먹으면 뭐해요. 배에 알통만 생기는데. 예술 작품을 감상하면 왠지 문화인이된 듯 싶어 가슴이 뿌듯하잖아요.
그런 그렇고 이 그림은 선생이 52세 때에 그린 그림으로 병진년 화첩(丙辰年畵帖,보물 제782호.호암미술관 소장)에 포함된 그림이여요.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논갈이 풍경으로 돌 무더기가 있는 시내 옆 논에서 멍에를 진 누렁 소가 이른 봄에 쟁기질하고 있어요. 그림의 소는 마치 ‘힘들지만 어차피 내 할 일 아닌가’하는 표정이라 기특하지요. 팔자 좋은 검둥개는 주인의 모습을 한가롭게 바라보고, 구부정한 나무 위에는 까치가 둥지를 만들다가 잠시 쉬고 있어요.
그래요, 저희 소들은 온전히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어요. 봄만 되면 엉덩이에 뼈가 드러날 정도로 논갈이하고, 거친 풀만 먹고서도 떡두꺼비같은 송아지를 낳아 든든한 살림 밑천도 장만해 주지요. 또 우리처럼 우직스럽고 성실하고 또 온순한 동물이 어디 있어요. 구정물에 짚을 듬성듬성 썰어 넣어 죽을 써 주면 그저 고맙고 감격스러워 눈을 스르르 감은 채 코를 푹 담그고는 후룩후룩 먹는 우리지요. 우리가 언제 물 달라, 밥 달라 하며 보채기를 했나요? 미리 먹어 둔 밥을 되꺼내어 새김질하니 주인이 밥을 주지 않았어도 누가 보면 밥을 그득 준 것처럼 보이잖아요. 얼마나 선비 같은 덕성을 가진 우리여요.
또 있어요. 속담에 ‘밤 까먹은 자리는 있어도 소 잡아먹은 자리는 없다.’고 했어요. 너무 슬프고 끔찍한 말이지만, 우리는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다는 말이래요. 사람은 우리를 갈기 갈기 찢어 부위마다 특별한 요리를 해 먹는데, 꼬리는 곰탕, 창자는 전골, 머리는 국, 뼈다귀는 탕, 가죽은 구두, 그 이외에 갈비, 안심, 등심, 제비추리 등등, 아 ! 슬프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수육이라는 못된 요리여요. 눈깔은 마나, 혀는 우설이라하여 별미로 먹는 거여요. 식당 아줌마가 하는 말을 들으면 사지까지 부들 부들 떨려요. "소 한 마리 잡아도 두 개 밖에는 없는 눈깔이 여요.”
기가 막혀. 그래도 우리가 세상에 남기는 유산이 있어요. 호랑이는 가죽을 사람은 이름을 남기지만 소는 소코뚜레를 남겨요. 코를 꿰뚫어 끼는 고리 모양의 나무인데, 그것을 부엌에 걸고는 소 잡아 제사를 지냈다며 자랑하는 짓이래요. 그래요. 우리는 평생을 사람에게 봉사하고도 또 죽어서도 남김 없이 몸을 바치는 불쌍한 짐승이라고요. 흐흐 흑!
나, 그리마 역시 알고 보면 불쌍한 소여요. 다른 소들은, “너는 주인 잘 만나 호강하겠다. 맛있는 음식도 먹고 논갈이도 안하고. 정말 부럽다 얘.” 라고 말하지만 모두 내 속을 모르고 하는 말이에요. 주인의 체면을 생각해 맹물을 먹고서도 이빨을 쑤셔대면 그들은 제가 걸쭉한 여물을 먹었다고 생각해요.
우리 주인은 청렴한 선비라 청백리로 선정된 분이에요. 도대체 뇌물은 받지 않고 허구헌 날 굶는 거여요. 살림은 항상 부족하고, 먹거리는 나라에서 받은 쌀로만 충당하였어요. 하루는 마님이 햅쌀로 밥을 지어 드렸더니, “어디서 쌀을 얻어 왔느냐.” 하니 마님이 주저하며 대답하기를, “녹미(祿米)가 심히 묵어서 먹을 수 없기에 이웃집에서 빌렸나이다.” 하자, 맹 정승은 얼굴을 찌푸리며, “이미 녹을 받았으니 그 녹미를 먹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무엇 때문에 빌렸오.” 하며 마님을 몹시 나무랐습니다.
그러니 어디 저라고 잘 먹을 수가 있겠어요. 한 끼 먹고 두끼 굶기가 일쑤였지요. 또 내가 사는 외양간은 어떠했는지는 주인 집의 사정을 알면 짐작을 할거여요. 하루는 병조 판서가 일을 품하러 와 방에 앉으니, 마침 구멍이 난 지붕으로 소낙비가 쏟아져 관복이 모두 젖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정승의 집이 그러한데 내 어찌 바깥 행랑채가 필요하리요.” 하며 바야흐로 짓던 바깥 행랑을 철거하였다 합니다. 주인 집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니 내 집이라고 비바람을 가렸겠어요? 춥고 배고프고 내 신세였지요. 그렇지만 저처럼 주인의 사랑을 많이 받은 소도 드믈거여요. 외출을 할 때면 항상 내 등을 타고 다니셨던 맹 정승은 돌아가시며, “내가 타고 다니던 그리마를 내 곁에 묻어다오.” 라고 유언을 남기셨어요. 저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어요. 그러자 후손들은 내 시신을 경기도 광주 직리에 있는 맹 정승 산소의 위쪽에 묻어 지금도 내 무덤이 전해져 와요. 저는 세상에 유일하게 무덤이 있는 소라고요. 기네스 북에 올라갈 감이잖아요. 저 무덤에서 바라보면 앞 쪽으로 문형산이 높게 보여 산세와 전망이 매우 좋아요. 한 번 놀러 오세요. 제가 갈비를 준비해 두었다가 구워드릴께요. 아셨죠?
<경작도, 단원 김홍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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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고제희의 역사나들이'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