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전설, 설화

[스크랩] 자린고비(慈仁考碑)의 조륵

道雨 2008. 9. 10. 15:28

 

 

 


 

 

부자가 되는 가장 고전적인 방법은 역시 검약이다.

절약하여 부를 이룰 수 있었던 조선 시대 충북 음성 조륵의 일화를 소개한다.

 

‘자린고비’의 어원이 되었을 정도로 구두쇠였지만

근검 절약정신과 자선사업의 행적을 남긴 조륵을 통해

제2의 IMF라 할 정도로 살기 팍팍한 우리시대의 새로운 자린고비의 상을 돌아본다.

돈과 부에 대한 선인의 태도를 엿보고 부자되기의 혜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린고비'라는 말은 절인굴비라는 말이 세월이 흐르면서 바뀌어서 그렇게 불린다는 설도 있고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지방을 해마다 새로 쓰지 않기 위해

기름에 절였다가 다시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는 설도 있다.


조륵(1649~1714)은 조선시대 때 충북 음성 사람이다.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충주 사람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당시에 음성, 이천, 장호원 등을 충주로 통칭해서 부르는 일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륵은 조선조 인조 때 참봉 조유증(趙惟曾)의 넷째 아들로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에서 태어났다.

음성에는 조륵의 생가가 남아 있다.

‘자린고비’가 아닌 ‘자인고비(慈仁考碑)’의 별명으로 조정까지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이를 아름답게 여긴 영조가 가자(加資,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올리는 일)했다고 한다.


따라올 자 없는 음성의 구두쇠

조륵은 음성 인근이 떠들썩할 정도의 구두쇠였다.

그가 어찌나 인색한지 사람들은 그를 수전노라고 부르면서

손가락질을 하거나 비웃었다.

이웃에 무슨 일이 있어도 조륵을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조륵은 매사에 철저하게 인색했다.

인색하지 않으면 돈을 모을 수 없다는 것이 조륵의 신념이었다.

 

조륵도 마을 사람들의 경조사에 일체 참여하지 않았다.
“허튼 곳에 돈을 써서는 안 된다.”
조륵은 허례허식에 일체 돈을 쓰지 않았다.

심지어 마을사람들이 갑자기 돈이 필요해 빌려달라고 해도

결코 빌려주지 않았다.

 

어느 여름 날 그의 집 장독에 쇠파리가 앉았다가 날아갔다.
“저 장 도둑놈 잡아라.”
조륵은 파리의 다리에 장이 묻은 것을 보고 쫓아가기 시작해,
음성에서 단양까지 내달렸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조륵의 절약 정신을 강조하기 위한 기행을 의미하고 인색함을 풍자하는 것이다.

음성에서 단양까지라면 2백리가 넘는다.

도망가던 파리가 어정대던 곳이라서 ‘어정개’,

자린고비가 파리를 놓치고 ‘아차 이제 놓쳤구나!’라고 하였다고 해서 ‘아차지고개’라는 이름이

여러 지방의 지명으로 생기기까지 했다.


절인굴비의 설화는

조륵이 제사를 지내고 굴비를 천장에 매달아놓고 쳐다보면서 식사를 했다는 대목까지 만들어졌다.

아들이 굴비가 먹고 싶어서 여러 번 쳐다보자 짜다고 야단을 치는 모습은

절약정신이 얼마나 몸에 배어 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어질다는 것이야.

공자는 어질다는 것을 남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했는데 쓸데없는

체면 때문에 자선을 베푸는 것은 돈을 낭비하는 첫 번째 길이야.”
조륵은 마을 사람들에게 항상 그렇게 말했다.


“두 번째는 무어요?” 마을 사람들이 조륵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예의라는 것이다. 누가 나에게 선물을 하면 나도 선물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남에게 선물을 받고 갚지 않아야 돈을 모으지

허장성세로 저쪽에서 선물을 했다고 이쪽에서도 선물을 하면 어떻게 돈을 모으겠나?”
그 말에 마을 사람은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조륵은 체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염치없는 짓이라도 서슴지 않았고,

마침내 음성 지역 일대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다. 하루는 전라도의 구두쇠가 찾아왔다.
“선생, 나도 전라도에서는 소문난 구두쇠올시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구두쇠가 되어야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그 비결을 배우려고 천릿길을 왔으니 가르쳐주십시오.”
전라도의 구두쇠가 넙죽 절을 하고 조륵에게 물었다.
“손님, 그러면 나하고 같이 나갑시다.”
조륵은 전라도 구두쇠를 데리고 집을 나와 충주 탄금대로 가기 시작했다.

음성에서 충주까지는 1백리가 넘는다.

전라도 구두쇠는 신발을 아끼기 위해 신을 벗어 한 짝은 들고 한 짝을 신고 있었다.

그는 교대로 신발을 신고 갔다.

그런데 음성의 구두쇠 조륵은 아예 신발 두 짝을 모두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전라도 구두쇠는 조륵이 맨발로 걷는 것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충주 탄금대에 이르렀다.

탄금대는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탄 곳으로 유명하기도 했고

임진왜란 때 신립장군이 왜군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곳이기도 했다.

탄금대 정상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었다. 조륵은 강물이 시퍼렇게 굽이쳐 흐르는 강물 쪽으로

뻗은 소나무가지 앞에 가더니 전라도 구두쇠를 보고 말했다.


“손님은 저 소나무 밑에 가서 두 손으로 가지 끝에 매어 달리시오.

그럼 내가 돈을 버는 비결을 알려 드리겠소.”
조륵말에 전라도 구두쇠는 두려워하면서도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이제는 한쪽 팔을 놓으시오.”
“아니, 그러면 저 시퍼런 강물에 빠져 죽지 않습니까!”
전라도 구두쇠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탄금대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다 강물이 시퍼렇게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아차하면 죽는 순간이었다.
“그러면 이제 올라오시오.”
전라도 구두쇠는 그때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절벽에서 올라왔다.
“손님, 들어보시오. 거부가 되려면 예사로운 구두쇠 정도로는 안 됩니다.

지금 손님이 나무 가지에 매달려서 죽게 되었을 때의 그 순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손을 놓으면 죽으니까요. 그러니까 만사를 죽기를 각오하고 실행한다면 목적한 일을 달성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돈을 아끼는 것도 죽을 각오를 하고 아껴야한다는 말이오.

그것이 돈을 버는 방법이오.”


자린고비가 아닌 자인고비 조륵


조륵의 환갑날이 돌아왔다. 조륵은 음식을 푸짐하게 준비하고 마을 사람들을 모두 초대했다.
“여러분, 그동안 내가 인색했다고 흉을 많이 보았을 것이오.

허나 나는 나 혼자 잘 살려고 구두쇠 노릇을 한 것이 아니요.

오늘 찾아오신 여러분을 위하여 도움이 되고자 근검절약을

내 평생의 사업으로 실천해 온 것인데 이제 그 뜻도 이루어지고 오늘이 마침 내 인생의 환갑날이니 이제 내가 한 일은 다 끝났소. 그래서 그동안 내가 인색한 짓을 해서 모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소.”

조륵은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웃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단순한 구두쇠로만 생각했던 조륵이 선행을 베풀고 죽자, 인자하고 어진 사람을 높이

기리는 비석이라는 뜻의 ‘자인고비(慈仁考碑) 송덕비’를 세워 행적을 기리고 있다.

자린고비의 전설은 인색한 부자를 풍자하기도 하고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얼마나 인색하게 살아야하는지 일깨우는 고사로 많이 이용된다.

조륵은 기행과 파행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고 후대로 오면서 전설화되었다.

그러나 절약에 대한 그의 정신은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 이수광 <부자열전>의 저자 / 사진, 음성군청 문화공보과 / 일러스트, 홍동선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9-03

 

 

 

 

 

출처 : 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글쓴이 : Gijuzzang Drea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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