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전설, 설화

마음을 훔쳐버린 도둑들

道雨 2008. 11. 27. 11:22

 

 

 

마음을 훔쳐버린 도둑들 

[안대회의 조선의 비주류 인생]


깨끗하게 재산의 반쪽을 가져간 신사 강도와 시·노래로 놀다가 재산을 ‘선물’받은 소년 호걸들

 

조선 후기에는 치안이 그리 안정적이지 못해 온갖 도둑과 강도가 사람들을 괴롭혔다. 일지매나 홍길동 같은 의적이 탐관오리와 부자를 절도의 대상으로 삼아 민중의 성원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부류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도둑은 도둑, 강도는 강도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도둑과 강도가 모두 똑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의 행위도 천차만별이라서 좀도둑이나 재물을 훔치는 도둑에서 인명을 살상하는 잔악한 강도까지 다양하다.

 

비 피하는 나그네를 집안으로 들였는데…

» 마음을 훔쳐버린 도둑들.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그때에는 집단을 이루어 야간은 물론 백주대낮에도 거리낌없이 양민을 해치고 재물을 약탈하는 군도(群盜)가 성행했다. 그런 군도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힘을 지니지 못한 치안 부재의 상황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심각했다. 한 가지 사례만 들면, 1887년 9월 수원의 지지대 고개에서 수원부사 부인의 행차를 군도가 대낮에 겁박해도 수원의 관군은 뻔히 바라만 보고 아무런 조처도 하지 못했다. 충청도 면천에 귀양와 있던 김윤식(金允植)은 그 소식을 듣고 한편으로 놀라고 한편으로 탄식하며 일기 <음청사>(陰晴史)에 그 사실을 기록해놓았다. 이 방대한 일기에는 군도의 출몰을 보고하는 기록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흉포한 사건이 두둔하거나 미화할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둑과 강도에 얽힌 사건은 흥밋거리 이야기로서 사람들의 입에 올랐고,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은 기록에도 남아 있다. 특히 기발한 방법으로 절도행위를 하거나 강도짓을 한 사건이 종종 등장한다. 그들은 흉기로 사람을 겁박하거나 상해를 가해 재물을 취하는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라, 사람의 의표를 찌르는 특별한 방법을 사용하거나 피해자를 배려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매너가 있는 신사 강도나 아주 지적인 풍모가 보이는 강도라고나 할까? 증오할 수만은 없고 멋진 면을 지닌, 그러나 강도임에는 분명한 그런 유명 범죄자들이다. 특이한 만큼 기이한 행각의 도적과 강도의 사연이 여러 기록에 등장해 유명세를 탔는데 <추재기이>에도 한 편의 사연이 실려 있다.

아주 큰 부자인 남양(南陽) 홍씨(洪氏)는 손님을 좋아했다. 하루는 어떤 나그네가 비를 피하려고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를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그는 의외로 시도 잘 짓고, 술도 잘 마시며, 바둑도 썩 잘 두었다. 밖에서는 비가 종일 내리고 있었다. 무료함을 깨뜨릴 수 있겠다고 생각한 홍씨는 아주 기뻐서 아예 그더러 비도 오는데 하룻밤 자고 가라고 했다.

그렇게 대화도 나누고 식사도 하면서 밤중이 되었을 때, 나그네는 단소를 하나 꺼내 보여주며 “이것은 황새 정강이뼈로 만든 물건이랍니다. 어른께서 한 번 들어보실 만할 겁니다”라고 말하고는 주인을 위해 한 곡 멋지게 연주했다. 단소의 맑고 우아한 소리 탓인지 내리던 비는 어느 사이 그치고 구름 속에 감추어진 달빛이 어슴푸레 비췄다. 주인은 음악과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그때 나그네는 슬며시 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들었다. 서슬 퍼런 칼날이 불빛에 번쩍였다. 그 칼을 보고서 주인은 그제야 나그네가 평범한 과객이 아니라 강도임을 깨닫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 순간 창밖에 누군가 다가와 “소인들이 이제 당도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옆에 있는 나그네는 강도단의 두목이고, 밖에 있는 자들은 졸개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좀전에 주인이 들은 단소 연주는 졸개를 부른 신호였음이 틀림없었다.



혼자 돌아온 나귀와 포대 하나

마당의 졸개들에게 두목은 오른손으로는 검을, 왼손으로는 주인의 손을 잡고 “주인께서 어지시므로 차마 다 가져가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모든 물건을 반으로 나누되 저 검은 나귀는 나눌 수 없으므로 그대로 남겨두어 나그네를 잘 대해준 주인장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노라”라고 명령을 내렸다. 모두가 “잘 알겠습니다!” 대꾸하더니 곧 이어 “일을 다 해결하였습니다!”라고 했다. 나그네는 그제야 일어나 주인에게 예를 표하고는 자리를 떴다.

강도들이 모두 나간 뒤에 주인은 온 집안의 물건을 일일이 점점해보았다. 물건은 크기를 따질 것 없이 모두 반으로 나누어 가져갔고, 상해를 당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나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하나밖에는….

어이없게도 감쪽같이 집안이 털린 주인은 강도를 당한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누설하지 말라고 아랫사람을 단속했다. 많은 재물을 잃기는 했으나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강도들이 재물을 몽땅 강탈할 수도 있었지만 은덕을 갚는다며 반만을 가져갔기 때문이리라. 강도임에는 분명하지만 의리와 금도(襟度)가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런 판단은 몇 시간이 지난 뒤에 사실로 드러났다.

강도떼가 물러간 그날 정오 무렵에 사라졌던 나귀가 저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나귀 등에 짚풀로 만든 포대가 실려 있었고, 포대 위에는 간단한 사연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못된 졸개가 명령을 어겼기로 삼가 그놈의 머리를 보내 사죄하는 바입니다.”

역시 대범하고 의리가 있는 강도답다. 두목의 명령을 어긴 부하의 목을 베어 조직의 위계를 세웠고, 주인과 약속을 지켜 큰 도둑임을 보여주었으며, 굳이 주인에게 잘린 목을 보내 공포심을 불어넣고 뒤탈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그로서는 일거삼득이다.

기지를 발휘해 계획대로 차분하게 재물을 강탈하면서 주인을 최대한 예우한 이 강도는 평범한 도적과는 급이 다르다. 매너를 지키며 품위 있게 강도짓을 한 이 강도는 그런 자에게 기대할 수 없는 자신감과 여유와 금도가 보여 사연을 듣는 이로 하여금 상쾌함을 느끼게 만든다. 그렇기에 조수삼의 <추재기이>에까지 사연이 올랐을 것이다.

사건의 세부는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한 유형의 강도가 다른 기록에도 여럿 실려 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성대중(成大中)의 <청성잡기>와 유희(柳僖)의 <문통>(文通)에도 기발한 강도가 등장한다. 앞 책의 강도는 이렇다. 한양의 부잣집 잔치에 나타난 한 걸인이 술과 음식을 배불리 먹은 뒤에 손톱을 깎는다며 손님이 찬 패도를 빌렸다. 패도의 섬뜩한 칼날로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이제야 죽을 자리를 얻었다고 하며 자살하려 하자 손님과 기생이 모든 재물을 내놓았다. 그는 종들의 호위까지 받아가며 안전하게 돌아갔다. 이자는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어 재물을 갈취하는 유형의 강도였다.

 

베개 위 놓인 물건을 가지러 오겠소

<언문지>(諺文志)를 쓴 19세기 전반의 학자 유희는 1812년에 협객 도둑을 도협(盜俠)이라 하고 그들에 관한 몇 가지 실화를 기록한 ‘도협서’(盜俠敍)를 썼다. 그 글에는 이규(李珪)나 강수평(姜壽平), 임점방(林占房) 같은 도둑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경기도 고을에서 발생한 한 사건이 흥미롭다. 노복의 재물 수만 냥을 강탈한 조정의 고관이 어느 날 감쪽같이 금고 속의 재물을 털렸다. 고관은 사방에 탐정을 보냈다. 탐정 하나가 벼랑 끝에서 십칠팔 세 되는 여장 남자를 용의자로 찾았는데 그가 고관에게 갖다주라며 봉물을 하나 던져주고 산을 넘어갔다. 탐정의 능력으로는 가지 못할 곳이었다. 고관에게 봉물을 전했고, 고관이 봉물을 열어보자 수놓은 베개 한 쌍과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 편지를 본 고관은 낯빛이 확 바뀌더니 더 이상 도둑의 뒤를 좇지 않았다. 그 편지의 내용이 뒤에 밝혀졌다.

“삼년 전에 네가 남의 아내를 불러다 동침하였기에 함께 잔 베개를 가져왔으니 악행을 고치기 바란다. 그렇지 않을 때엔 베개 위에 놓인 물건을 또 가져오리니 그깟 수만 냥쯤이야 말해 무엇하랴!”

베개 위에 놓인 물건이란 곧 고관의 머리다. 이 도둑의 절도는 고관의 비리를 응징하는 의미가 있고, 잃은 돈을 찾으려 하면 머리를 베어갈 것이라고 섬뜩한 경고를 했다. 그의 솜씨라면 못할 것도 없다는 판단을 고관은 했을 것이다.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됐을 미소년은 일부러 담대하게 자신을 드러냈다.

유희는 조수삼과 동시대 사람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대담하면서도 멋지고 신사적인 강도 이야기가 순전히 허구인 것은 아니다. 당시 사회 현실을 일정하게 반영한다고 보아야 한다. <계서야담>이나 <청구야담>에 선비가 군도의 두령이 되어 활약하는 이야기가 각각 실려 있다. 그들은 완력과 흉포함을 발휘해 재물을 강탈하는 수준 낮은 강도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지모와 전략을 갖춘 선비로서 군도가 모인 산채의 두목이 되어 국가의 재물을 운송하는 비장의 행렬을 가장해 부자를 안심시킨 뒤 재물을 강탈하고 유유자적 사라졌다. 조금씩 성격이 다르지만 상식을 뛰어넘는 대범한 강도짓이 현실 속에서 종종 발생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두려워하자 검무를 춰 위로해

이렇게 대범하고 신사적인 조선 후기의 강도를 보면, 청나라 초엽의 장조(張潮)가 편찬한 <우초신지>(虞初新志)란 책에 실린 강도가 떠오른다. 기상천외한 강도의 전형이라고 할 사연으로, 양형선(楊衡選)이 쓴 ‘강도의 기록’(紀盜)이란 글에 나온다. 18세기 이후 조선에서 널리 읽힌 책이므로 이 강도의 형상은 지식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가능성이 높다. 도둑 가운데도 명사(名士)가 있어서 명사 도둑이라 부를 만한 실화이다. 상당히 긴 사연이지만 간단하게 살펴보면 이렇다.

소명이(蕭明彛) 선생이 애첩과 함께 가을걷이를 감독하러 별장에 머물 때 사건이 발생했다. 밤중에 지붕에서 소년 셋이 내려와 창문을 열고 들어온 뒤 선생의 잠을 깨우고 옷을 가져다 입게 하였다. 그리고 거실로 모셔다가 윗자리에 앉히고 둘러앉았다. 두목은 “저는 선생님의 글을 읽었습니다”라고 하며 한편 한편 외워서 들려주었다. 가장 좋은 작품은 무엇무엇이며, 그중에서 어떤 구절이 어때서 좋다고 말했다. 또 아무개 고관의 집에서 선생이 술을 열다섯 잔 거푸 마시는 호쾌한 장면을 보고서 흠모했고, 강남의 비문 가운데 선생의 작품이 걸작이라고 했다. 선생을 협박하려는 자가 있자 “이 소 선생님은 남들에게 하듯이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만류하고 술과 안주를 달라고 해서 먹었다. 술이 거나해지자 그들은 “저희들은 선생님의 명성을 들은 지 오랩니다. 천금의 노잣돈을 아끼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니 주머니를 털어 저희 바램에 보상해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선생이 “어제 사백 금이 있었는데 그대들이 조금 늦게 왔소. 오늘 아침 벌써 성안으로 보내 남아 있는 것은 겨우 술값 27금과 인삼 여덟 냥과 옥띠 하나뿐이오. 이거라도 바치겠소.” 좌우에서 숨긴 것이 있다고 의심하자 두목이 “선생의 진실한 말이다”라며 만류했다. 한밤중이 되어 선생이 피곤하고 두려움에 떨자 그들은 검무를 추어 선생을 위로했다. 그들은 집의 구조를 분석할 줄 알았고, 선생의 장서를 둘러보며 일일이 평했다. 나군(羅君)이 글씨를 쓴 부채를 보고서는 “나는 이분과 친분이 있지요. 진귀하게 보관해야지요” 하며 가져갔다. 그들이 떠날 때 선생이 “그대들은 모두 소년 호걸일세. 내일까지 기다리면 사백 금을 주겠으니 어떤가?”라고 하자 “세상에는 지금껏 그런 일이 없다”라고 사양하며 떠났다. 선생은 그들이 나무배를 타고 유유히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런 강도면 문을 열어 맞이하겠네

지적인데다 예술을 알고 명사를 대접할 줄 아는, 그야말로 강도의 세계에서 만날 수 없는 명사다. 지은이는 이런 강도는 평범한 도둑과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고 했고, 책을 편찬한 장조는 이런 강도라면 문을 열어 맞이해야 한다고 평을 달았다. 과연 이런 강도가 존재했을까? 문인의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구체적이다. 아무튼 당시에 기상천외한 강도들의 통쾌한 사연이 민간에서 널리 전해졌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

 

 

* 윗 글은 '한겨레 21'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