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을 막는 것에 그치지 말고, 최선을 행하길...
-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를 읽고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조선시대 때 어느 기개 높은 선비가 처형장에서 마지막으로 했음직한 이 말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유토피아』를 쓴 '토마스 모어'이다.
그리고 얼마 전 10.26 보궐선거에서 서울시장으로 당선된 박원순 변호사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여 고른 10가지의 세기의 재판이야기를 묶어놓은 책 제목이기도 하다.
(이 책의 부제목이 '세기의 재판이야기'이다. 한겨레신문사 출판)
10가지의 재판을 시대 순으로 엮었는데, 소크라테스, 예수, 잔 다르크, 토마스 모어, 마녀, 갈릴레이, 드레퓌스, 페탱, 로젠버그 부부, 채털리 부인의 사랑 등이다.
이 중에서 '마녀'는 중세시대에 처형된 약 100만 명에 달하는 여성들을 포괄하고 있으며,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저작물(소설)에 대한 '금서' 조치가 적법한 지를 묻는 재판이다.
필자(박원순)가 1991년에서 93년까지 영국과 미국에 머물면서 역사 속의 인물들에 대한 재판 기록과 연구서들을 보고, 기타 자료를 모아 정리한 것으로, 1999년에 한겨레신문사에서 초판을 발행했다.
10가지의 재판이야기가 모두 의미있는 것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흥미있게 읽은 부분은 '토마스 모어'와 '마녀'였다.
나는 토마스 모어를 『유토피아』라는 이상세계를 그린 소설(사실 나는 이 책을 읽어보지도 못했다)의 작가 이름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영어권 국가에서 모어는 가장 위트있는 사람, 가장 총명한 영국인으로 손꼽힌다고 한다.
귀족 출신도 아닌 모어였지만,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의 출중한 능력과 왕의 총애 덕분에 눈부시게 성장하고 성공한 사람이었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하원의원, 재무차관, 하원의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나중에는 대법관(당시의 대법관은 수상 직책을 겸하였다고 한다)에 이르렀는데, 영국 역사상 모어가 재임했던 시기만큼 송사가 공정하고 신속하게 진행된 적이 없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호평을 받은 모어가 종래에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고, 그의 머리는 창에 꽂힌 채 런던탑 앞에 몇 주일 동안이나 걸려있었다고 하니, 역사의 흐름은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당시 영국왕이던 헨리 8세의 이혼과 결혼 문제로 교황청과 알력이 생긴 것과 때를 같이하여, 모어는 건강상의 이유로 대법관직을 사직하였다.
교황은 영국왕(헨리 8세)를 파문하였으며, 영국왕은 수장령(首長令 : 국왕을 영국 교회의 유일한 최고의 首 長 으로 규정한 법률)으로 맞서, 가톨릭 교회 및 교황과 결별하였다.
이미 대법관을 사임한 모어는 왕의 이혼과 결혼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며, 왕이 주관하는 각종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모어의 침묵을 새로운 질서(왕의 이혼과 결혼, 수장령 등)에 대한 저항으로 인식한 영국왕과 실권자 크롬웰은, '왕이 영국교회의 수장임을 공개적으로 시인하지 않는 것은 왕에 대한 적대행위'라는 논리로 모어를 협박하고 회유하였으나, 모어가 이에 응하지 않자 모어를 검찰에 소환하였다.
모어가 심문을 받는 동안, 영국과 유럽 전역의 귀족, 지식인들이 영국왕과 크롬웰의 조처에 항의하고, 모어의 방면을 호소했지만, 오히려 왕으로 하여금 모어를 굴복시켜야 할 필요성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해줄 뿐이었다.
모어는 일단 석방되었으나, 새로운 왕위계승법이 통과되고 모든 귀족과 공직자들은 이 법령에 선서하고 서명을 강요하였으며, 거부할 경우 반역죄로 체포될 것이라고 하였다.
모어는 그 법령에 교황의 영적지도권을 부정하는 문구가 들어있다는 이유로 서명을 하지 않았으며, 다시 소환되어 재판을 받고 처형당할 때 까지 15개월 동안 런던탑 감옥에서 보냈다.
로마의 법학자 율피아누스 이후 '사람은 누구나 생각만으로는 처벌받지 아니한다.'는 법이론이 확립된 터라, 모어는 침묵의 자유를 위해 항변하였으나, 사형을 면할 수 없었다.
사형이 집행되는 단두대로 올라가면서도 모어는 해학을 잃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그리고 머리를 쑥 내밀며, 자신의 수염이 잘려지지 않게 하였다고 한다.
'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른 적이 없으니까' 라는 말과 함께.
그리스어로 '아무 데도 없는 곳'이라는 뜻의 『유토피아』는 유럽의 여러 도시를 방문, 유수의 인문학자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갖게 된 생각을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풍자와 해학, 기지가 넘쳐나는 이 책은 모어가 라파엘 히슬로데이(그리스어로 '헛소리'라는 뜻)라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서술되어있다.
제1부에서는 영국을 비롯한 당시 유럽의 현실에 대한 비판이, 제2부에서는 유토피아라는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도덕, 종교를 소개하였다.
모어는 여기서 라파엘의 탁월한 식견에 감복하여, 그에게 왕의 고문관으로 일해보라고 권하지만 거절당한다.
"왕의 고문관이 되면 동료들의 꾐과 압력에 못견뎌 부패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리석고 못난 놈이라고 동료들로부터 지탄받을 걸 각오하고 계속 건전하고 순진한 생각을 품고 있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것 외에는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간접적인 정책지도로 사태를 시정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실제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망상에 불과합니다."
모어 자신의 의견도 라파엘과 같았으나, 그래도 최악을 막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이 부분에서 이것(최악을 막는 것)이 박원순 변호사가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게 된 계기 중의 하나가 된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어는 고위관리로 출세하고 세속적 향락을 누리면서도, 한쪽은 깊은 영성과 도덕의 세계에 한발을 걸치고 있었다.
그가 죽는 날까지 딸 마거릿 만이 알고있도록 한 한 가지 비밀이 있었다.
그는 좋은 관복 안에 늘 거친 모직셔츠와 말총으로 만든 속옷을 입어 피를 흘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이로써 하느님의 뜻을 잊지 않고, 세속의 단맛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경계했던 것이다.
그는 『유토피아』에서 권력자들의 부패하고 어리석은 태도를 다음과 같이 질책하였다.
별이나 태양 그 자체를 바라보며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데도 태양이나 별빛에 비하면 희미하기 그지없는 보석을 손에 넣고 보아야만 기쁨을 느끼는 족속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유토피아인들은 정말 이상하게 생각하지요. ....
쓸모라고는 전혀 없으면서도 탐욕스럽고 악독한 인민과, 겸손하면서도 자신의 이득을 희생하면서까지 국가에 봉사하는 두 종류의 국민이 있습니다. ...
모어는 '쓸모라고는 전혀 없으면서도 탐욕스럽고 악독한 계급'에 가까왔지만, 그 마음가짐이나 처신에 있어서는 분명히 반대편에 속했다.
그는 '하느님과 재물은 동시에 섬기지 못한다'는 예수의 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실천한 사람이었다.
캐네디 대통령은 암살당하기 직전 한 연설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힘센 것은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니다. 수소폭탄도 유도미사일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자유롭고 독립적이고자 하는 영원한 욕망이다" 라고 말했다.
모어와 같이 자신의 목을 걸고 '최악'의 길을 막으려 애썼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날 자신의 양심을 지킨다는 이유만으로 감옥에 가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 지난 10.26 보궐선거에서 위 책의 저자인 박원순 변호사는 시민후보로 나서 야권단일후보가 되고, 마침내 여권 후보를 누르고 서울시장으로 당선되었다.
최근의 사회는 단군 이래로 이런(야비하고 무지막지한) 지도자가 없었다는 평을 한 어느 학자의 말처럼, 깨어있는 사람들이나 지식인이라면 지나치게 반서민적, 반공공적, 반사회적, 반인권적인 정책들에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시절이 되었다.
모어의 사상과 같이,이 책에 씌어진 글귀처럼, 최악을 막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으나, 나는 박원순 변호사를 감히 한국의 만델라에 비유하면서, 모쪼록 최악을 막는 데 그치지 말고, 서민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최선의 정치와 행정을 펼쳐주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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