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강정마을 구럼비 파괴는 ‘4·3사건’ 판박이
(서프라이즈 / 아이엠피터 / 2012-03-10)
제주에 내려오면서 쓰고 싶었던 글이, 현대사에서 제주 4·3사건의 진실을 널리 알리려 했던 글입니다. 제주 4·3은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이 가진 아픔이자 역사이며 우리들의 삶이었기에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새 제주 강정마을을 보면 1948년 벌어진 제주 4·3이 2012년에 재현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시절 무자비하고 잔혹했던 아픔이 다시 자꾸 보입니다. 과연 1948년 제주와 2012년 제주, 무슨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경찰이여, 그대들은 누구를 위해 국민을 탄압하는가?
제주 강정마을 구럼비 해안에 폭음이 터지며 구럼비 바위가 깨져나가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제주도지사에게 하루빨리 이 공사를 중지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우근민 지사는 협조공문에 서명하고 나서 종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강정을 뒤로한 채 ‘제주자치경찰 기마대’ 창설식에 가 있었습니다.
▲ 제주자치경찰 기마대(좌) 1947년 기마경찰과 충돌하는 제주도민들(우) |
어떤 이는 제주도에 말이 흔하니 ‘제주경찰 기마대’ 창설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기마경찰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주 4·3의 시작이 바로 말을 탄 경찰로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1947년 3월1일 제주북국민학교 운동장에서 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집회는 경찰로부터 허가받은 집회였고 이날 모인 2만 5천~3만여 명의 학생과 주민들은 ‘친일파를 처단하자’ ‘부패경찰을 몰아내자’는 구호와 함께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날 집회를 위해 미군과 육지경찰 100여 명, 제주 경찰 330명이 철통 같은 경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말을 탄 경찰이 말발굽으로 한 어린아이를 밟았고 그대로 지나갔습니다. 이것을 본 성난 군중은 ‘저놈 잡아라’ 하고 외치면서 그 경찰을 쫓기 시작했고 그 경찰은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았습니다.
아이를 밟은 경찰을 따라가던 군중을 향해 경찰은 총을 쐈고 이날 경찰의 사격으로 6명이 사망했습니다. 사망자 가운데 한 명은 젖먹이 아기를 안고 죽은 스물한 살의 젊은 아기엄마였고, 또 한 명은 제주북국민학교 5학년 허두용 군이 있었습니다.
경찰은 이날 사건을 ‘경찰서 습격 사건’으로 규정하고 강경 대응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제주 4·3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날 모인 사람들이 어떤 이념을 갖고 모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방됐는데도 친일파들이 여전히 권력을 잡는 것이 부당하다 소리쳤고, 미군정이 되면서 쌀이 없어 먹을 것을 달라고 외쳤을 뿐입니다. (제주는 섬이라 외부에서 식량이 제대로 조달되지 않으면 아사자가 생기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선량한 시민들이 그저 모였다가 아이를 짓밟은 경찰을 잡겠다고 했을 뿐인데, 경찰은 총소리에 놀라 도망가던 군중을 향해 등 뒤에서 총을 쐈습니다. 나중에 조사해보니 이날 죽었던 사람은 단순 구경꾼들이었고 이들을 죽였던 사람은 모두 육지경찰이었습니다.
제주 4·3이 1947년 3월1일 이후 일 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시작된 원인은 경찰이 1947년 3월1일 사건을 빌미로 무자비한 탄압과 고문을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1948년 3월 조천중학교 2학년 김용철 군이 조천지서에 연행된 지 이틀 만에 몸 전체에 멍이 든 채 죽었습니다.
제주 전역 경찰서 유치장마다 넘쳐났던 무자비한 검거와 곤봉과 돌로 찍으며 악독하게 고문하다 나중에는 총살해버리는 학살에 견디다 못해 제주도민은 4·3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문규현 신부를 연행하는 경찰과 평화활동가를 배에서 밀어내는 경찰 |
제주인들에게 육지경찰은 죽음의 저승사자와 같았습니다. 지금 강정에도 육지경찰이 와 있습니다. 그들은 방패로 내리찍고 고령의 늙디 늙은 신부를 발로 패고 연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화염병도, 돌도, 하다못해 나뭇가지 하나 손에 쥐지 않은 평화활동가들과 주민을 막무가내로 연행하고 배 위에서 떠밀어 버립니다.
작은 카약을 큰 배로 밀어버리고, 경범죄에 해당하는 단순 죄목을 가지고도 사람들을 무자비로 체포 연행합니다. 이들은 경찰이 법적으로 규제할 공간이 아닌 부두에서조차 막무가내로 사람들을 막고 무조건 강제 해산 내지는 연행을 합니다.
국민을 패고 무조건 연행했던 1947년의 경찰과 2012년 강정의 경찰은 참으로 많이 닮았습니다.
대한민국 군인이여, 그대들이 진정한 군인인가?
국방부와 해군이 통합진보당 김지윤 비례대표 후보가 발언한 ‘제주해적기지’ 발언에 공식사과 요구와 함께 명예훼손에 대한 법적 대응을 검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해군과 국방부는 그전에 자신들이 했던 불법적인 일을 먼저 해명해야 합니다.
▲ UDT보트를 이용해 화약을 나르는 장면과 원래 신고했던 화약운반신고필증 |
화약을 운반하려면 반드시 운반신고필증을 교부받고, 신고한 수단과 경로에 따라 운반해야 합니다. 그런데 해군건설단의 하청을 받은 시공사는 육상 운반을 신고해놓고 바다를 통해 화약을 운반했습니다.
여기에 그 화약을 운반한 배가 UDT/SEAL 소속의 보트였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법과 절차를 무시한 행위이며 이런 절차를 무시한 이들은 총포도검화약류등 단속법 72조6호, 26조4항 위반으로 3년 이하 징역, 700만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야 합니다.
자신들의 불법은 태연하게 눈을 감고 사는 이들이 자신들을 비판한 단어 하나에 발끈해서 고발과 사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 정뜨르 비행장 암매장 유해 발굴 당시 모습 |
1950년 해병모슬포부대 해병대원들은 7월16일과 8월20일 두 차례에 걸쳐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이들은 구덩이 가장자리에 민간인을 끌고 와 한 명씩 세워놓고 지휘관으로부터 총알을 받아 ‘한 사람이 한 명씩 총살하라’는 명령에 따라 총을 쏴 민간인을 죽이고 시신을 호 안으로 떨어지게 했습니다.
1950년 8월30일 제주주둔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중령 김두찬은 제주경찰서장들에게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공문’을 보냅니다. 이 명령에 따라 수많은 민간인들이 재판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지금도 찾지 못한 제주 오름 곳곳에 묻혔습니다.
(1950년 8월 19일과 20일, 해병대 사령부가 제주읍 ‘정뜨르’ 비행장과 ‘모슬포’ 비행장 동편 ‘섯알오름’에서 총살, 암매장한 민간인은 1천여 명이었으며, 이 중 현재까지 수습된 유해는 210구에 불과합니다.)
바다에서 수영 장비를 뺏는 행위는 살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해군 SSU 대원들은 민간인의 수영 장비를 빼앗고 물속에서 폭행하면서, 물 위로는 V 자를 그리며 웃어대며 말을 했습니다.
해군이 해적과 다를 바가 없는 일을 벌이고도 이들은 이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회피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명예훼손이고 폭행범인지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과연 이러고도 이들을 대한민국 해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들은 해적보다 더 악독한 짓을 벌인 패륜아입니다.
(저 영상에 나온 SSU 대원들은 진심으로 참회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자식에게 이런 모습을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다면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해군은 감시행위는 할 수 있어도 절대로 폭행이나 연행, 철조망으로 미는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자국민을 패고 살인과 버금가는 행동을 하고 여학생의 팔을 꺾고 철조망에 낀 어린 학생을 잡아당겼던 이들을 누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군인이라고 누가 부를 수 있겠습니까?
과연 누가 빨갱이고 종북좌파인가?
대한민국에서 부당한 일을 보고 일어서는 사람들을 향해 군복을 입고 나서는 사람들이 늘 외치는 말이 있습니다.
‘종북좌파’
‘빨갱이’
저는 아직도 제가 왜 종북좌파 블로그로 분류돼 빨갱이 소릴 듣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흔한 주체사상이 뭔지도 모르고 북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이름 외에 북한 주요인물들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인데.
제주 4·3이 일어나기도 전에 제주도 학생들이 교문 밖을 뛰쳐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해방됐는데도 일제강점기 일본에 충성했던 교사들이 친일 교육을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고 친일경찰들이 여전히 제주도민을 다스리는 것에 분노했습니다.
제주 3.1절 발포 사건이 나고 나서 미군정은 3.1절 사건을 좌익의 배후조종에 의한 폭동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들에게는 진실보다 좌익을 몰아내는 것이 우선이었고 교묘하게 사건을 조작하기 시작했습니다.
▲ 이승만과 조병옥 모습(좌) 제주 4·3 당시 이승만 대통령 지시(우) |
조병옥 경무부장은 제주도에 도착해서 제주도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 같은 발언을 합니다.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 있다’
경찰 총수였던 조병옥보다 한 술 더 뜬 사람이 이승만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제주 진압을 위해 이런 지시를 내렸습니다.
‘가혹하게 탄압하라’
‘반항하면 제주도민을 다 죽여도 좋다’
경찰 총수 조병옥과 대통령 이승만에게 제주도의 진실과 양민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주도민을 그저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시끄러운 파리떼와 다를 바가 없이 취급했습니다.
제가 사는 중산간 마을은 4·3 당시, 지독히도 많은 주민이 토벌대의 토끼몰이식 진압으로 대량 학살을 당했고 온 마을이 불타 먹을 것도 잘 곳도 없는 악몽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토벌대에 의해 학살당했던 제주 4·3을 좌익 폭동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진실을 외면한 조병옥, 이승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1948년 11월21일부터 30일까지 중산간 마을 부근에서 기록상 615명이 학살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국군 9연대가 노획한 무기는 총 12정과 칼 11자루밖에 없었습니다. 총과 칼을 소지했던 33명 이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죽창을 들고 싸웠던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대부분 비무장 민간인들이었습니다.
분명 제주 4·3에서 좌익 무장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찰, 서청, 민보단, 국군 등 토벌대들은 소수의 무장대만 토벌했던 것이 아니라 제주도민 전체를 학살했습니다. 제주 4·3 사망자의 90%가 토벌대에 의해 사망했습니다.
▲ 제주 4·3 희생자 묘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같은 날 사망자와 유아 사망자들 |
제주 4·3 희생자 묘비에 있는 사망자 명단입니다. 제가 표시해놓은 사망자는 4세 남자아이, 3세 여자 아이, 2세 남자 아이입니다. 이들이 진정 무장폭도와 게릴라들입니까? 이런 명단은 아주 극히 일부입니다. 제주 4·3 피해자의 33%가 여성과 노약자였습니다.
강정마을을 보면서 제주 4·3을 떠올리는 사람이 저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제주도민은 제주 4·3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금기어였고 지금도 그때 죽은 사람(유족·후손)과 죽인 사람들 사이의 화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죽창으로 양민을 학살했던 사람 중에는 유독 빨갱이를 싫어하는 서청과 민보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일제강점기 같은 동포를 착취하고 재산을 불려 호화롭게 살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이 죽창으로 찔러 죽이며 빨갱이로 불렀던 양민들은,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던 자신들의 삶을 망쳤던 분풀이의 대상이었을 뿐입니다.
▲ 이영조 위원장이 발표한 4·3 관련 영문집 |
제주 4·3을 조사하면 할수록 저는 좌익이나 빨갱이들의 모습보다 동네 이웃 할머니, 아줌마, 새댁, 동네 꼬마들의 모습만 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꾸 지금까지 빨갱이로 불립니다.
이영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은 뉴라이트 출신 인물입니다. 그는 2010년 ‘한국 과거사 정리의 성과와 의의(Transitional Justice and Beyond in South Korean)’라는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합니다. 그는 여기서 반민특위를 해산한 이승만의 행동을 국가기반 건설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했으며 제주 4·3을 공산주의 세력이 주도한 폭동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주 4·3을 왜곡한 이영조 위원장이 새누리당 강남을 지역구 출마자로 낙점됐습니다.
저는 제주가 고향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국민학교 시절에는 제주 4·3이 북한 간첩과 빨갱이들의 폭동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제주에 내려와서 제주 4·3을 연구할수록 4.3은 결코 빨갱이를 진압한 것이 아니라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라는 진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진실과 왜곡하며 선량한 양민을 빨갱이로 둔갑시켰던 사람이 국회의원을 한다고 새누리당 공천을 받았습니다.
▲ 보수단체의 해군기지찬성 시위(좌, ⓒ오마이뉴스) 강정마을 주민이 해군기지 반대를 위한 집회에 가는 도중 보수단체의 조롱 속에 경찰의 제지를 받고 있는 장면 (우, ⓒ민중의소리) |
1947년 3월1일 사건 직후부터 육지에서 온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한자로 ‘서북’이라고 쓴 완장을 차고 경찰서는 물론 학교, 관공서에 근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자금모금을 핑계로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주민들에게 강매했습니다.
만약 이들이 파는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사지 않는 주민은 ‘좌익척결’이라는 이름으로 곤봉으로 얻어터지거나 죽창으로 찔려 죽거나 오름 구덩이에 총을 맞고 암매장당했습니다.
1947년 서북청년단, 민보단이 ‘좌익 빨갱이 척결’을 외쳤던 것처럼 2012년 제주에도 군복 입고 모자 쓴 사람들이 ‘종북쓰레기’ ‘빨갱이’ ‘종북좌파’를 외치고 있습니다.
▲ 제3회 제주국제사진공모전에서 은상을 받은 ‘강정마을’ ⓒ매튜호이 |
처음 글을 쓰면서 그저 강정마을 사태와 제주 4·3과 비슷하다고 느끼는 것은 저만의 생각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그동안 모아왔던 자료를 꺼내 지금 강정과 비교하면 할수록 그다지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큰 잘못은 친일파들을 청산하지 못한 죄이고, 두 번째는 친일파들이 권력과 부를 잡게 놔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에 충성했던 자들이 해방되고 나서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빨갱이 타령을 하며 독립투사와 양민, 그리고 그들을 친일파로 지목했던 지식인들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독재 정권과 야합하여 국가 안보를 외치며 종북타령을 합니다. 과연 그들에게 진정한 안보관이나 국가관이 있을까요?
우리가 역사를 돌이켜볼 때 빨갱이라고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던 자들의 실체는 일제강점기 같은 민족을 탄압하고 고문하고, 조선의 재산을 수탈하여 일본에 바치고 출세한 자들이었습니다. 일본에 충성을 다했던 이들이 이제 대한민국을 위해 안보를 외칩니다.
그들은 자신의 친일을 감추기 위해 반공을 외치고, 자신의 친일 행각을 밝혀내는 진실을 외치는 자들을 향해 ‘빨갱이’라는 논리를 내세웁니다. 지금껏 그들은 빨갱이 논리, 안보 논리로 모든 것을 장악하며 부와 권력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유치한 논리는 통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해적기지’ 논란과 제주 강정마을에 대한 객관적인 글을 써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료를 찾으면 찾을수록 진실은 친일파들이 제주도민을 좌익으로 몰아 학살했던 사건과 다를 바가 없는데 어떻게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된 안보를 찬성할 수 있겠습니까?
진실을 감추고 역사를 왜곡하는 자들이 살아 권력을 휘두르면서, 잘못된 안보의 논리를 가지고 국민을 탄압하고 연행합니다.
진정한 안보를 말하면 그 누가 반대하고 홀연히 일어나서 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겠습니까?
권력을 쟁취하고, 자신의 부를 쌓으면서 살아가는 자들의 거짓 안보는 1948년 제주 4·3 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이엠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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