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압박이 의회주의 존중인가
우리나라는 법치국가다. 정부 정책 수립과 집행은 법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입법권은 국회에 속한다. 국회가 법을 만들어야 정부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할 수 있다.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이다. 그러나 국회의 협조를 받지 못하면 정부 정책을 수립하거나 집행할 수 없다.
대통령이 속한 정당이 국회 다수일 때는 별문제가 없지만, 여소야대에서는 정부 정책이 헛바퀴를 돌기 쉽다. 분립형 권력 구조인 대통령제의 근본적 결함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역대 대통령은 국회 다수 의석을 확보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노태우 대통령은 3당 합당을 했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야당과 무소속 의원들을 영입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탄핵 역풍 덕을 봤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 직후 총선에서 압승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총선을 먼저 이기고 대통령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앞뒤의 총선을 다 이겼다.
역대 대통령이 그런대로 국정을 끌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국회 다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사정이 다르다. 당장 야당이나 무소속 의원 영입은 불가능해 보인다.
다음 총선은 2024년 4월10일이다. 총선에서 이기면 여대야소가 될 것이다. 그때까지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윤석열 대통령의 궁리는 무엇일까?
윤석열 대통령은 ‘의회주의 존중’을 해답으로 내놓았다. 대선 이튿날인 3월10일 박병석 국회의장을 방문해 “의회주의를 늘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5월16일 국회 추경예산안 시정연설에서는 의회주의라는 단어를 네차례나 사용했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는 바로 의회주의”라고 했고 “의회주의는 국정 운영의 중심이 의회라는 것”이라고 했다.
“추경안은 우리 앞에 놓인 도전을 의회주의 원리에 따라 풀어가는 첫걸음”이라고 했고, “오늘 이 자리가 우리의 빛나는 의회주의 역사에 자랑스러운 한 페이지로 기록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의회 경험 없는 대통령의 발언으로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이 실제 보여주는 모습은 의회주의와 영 거리가 멀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추가경정예산안 처리가 지연되자, 5월27일 느닷없이 “국회가 이렇게까지 협조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고 국회를 비난했다.
출근길 문답에서는 민주당에 대한 적대감을 감추지 않는다. 검찰 편중 인사 지적에 “과거엔 민변 출신들이 아주 도배를 하지 않았느냐”고 했다. 정치 보복 수사 비판엔 “민주당 정부 때는 안 했냐”고 맞받았다. 야당과의 대화는 감감무소식이다.
지금 국회 다수 세력은 민주당이다. 의회주의를 존중하려면 민주당을 존중해야 한다. 민주당을 미워하거나 무시하면서 의회주의를 존중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거나 가식이다.
최근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논란에 대해,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문재인 전 대통령과 민주당 비난에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다. 민주당 정권에 대한 검찰의 수사를 감싸며 “정치 보복은 문재인 정부가 했다”고 했다.
희한한 일이다. 야당과 협상하고 성과를 내야 하는 집권 여당 원내대표가 이러는 이유가 뭘까? 윤석열 대통령 뜻이라고 봐야 한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윤석열 대통령 덕분에 원내대표가 된 사람이다. 박병석 국회의장의 검찰개혁 중재안에 서명하고 발표까지 했다가 뒤집어놓고도 원내대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같다.
국민의힘 원내대표단 의원 중에는 “원 구성 협상이 지연된다고 해서 우리가 손해 볼 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여당 의원으로서 책임감도 없고 개념도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검찰총장으로 조국 장관 후보자 수사를 지휘하던 2019년 9월 대검 간부들에게 “일각에서 나를 ‘검찰주의자’라고 평가하지만, 기본적으로 ‘헌법주의자’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대통령 당선과 취임 이후 지금까지 행보를 보면 검찰주의자가 맞는 것 같다.
검찰총장 참모들을 비서실로 데려왔고, 검사 출신들을 행정부 요직에 앉혔다. 검찰 인사에서도 이른바 ‘윤석열 사단’을 전진 배치했다. 검찰을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생각이 아니라면 이럴 수 없다. 야당과 국회를 힘으로 굴복시키려는 것 같다. 잘될까?
성한용 | 정치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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