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

해인사 답사 사진 (2008. 6. 1)

道雨 2008. 6. 4. 16:39

 

 

 

 

                   해인사 답사 사진 (2008. 6. 1)

 

 

 

* 고령 지역에서 개실마을을 마지막으로 답사하고, 국도를 따라 해인사까지 갔다. 곧바로 해인사를 목표로 간다면, 88고속도로 해인사 나들목까지 바로 가는 것이 시간적으로 절약된다.

 

 

 * 해인사 방문기념으로 한 컷...

 

 

  해인사(海印寺)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 중턱에 있는 사찰로서, 팔만대장경세계기록유산,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 150여개의 말사(末寺)를 거느리고 있다.

  불교의 삼보(三寶)사찰 중 법보(法寶) 사찰로 유명하다.

 

  신라시대 애장왕 3년(802년)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창건했다. 그들은 가야산에 초막을 세우고 참선을 했는데, 등창으로 고생하던 애장왕비의 병을 낫게 해주어, 애장왕이 절을 창건하도록 했다.

  순응과 이정 이후 결언대덕(決言大德)이란 승려가 사찰 창건을 계속했고 주지가 되었다. 918년에는 희랑(希郞)이라는 당시 해인사 주지가 고려를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고려 태조가 국찰(國刹)로 삼았다.

  해인사는 5차례가 넘는 화재로 인해 여러번 중창되었는데, 현재의 전각들은 대부분 조선 말기 때의 것이다.

  해인사는 1993년성철스님이 입적한 곳이기도 하다.

 

 

  해인사는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하나이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양산의 통도사가 불보사찰이고,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합천 해인사가 법보사찰이며, 훌륭한 고승과 국사(왕사)들을 많이 배출한 순천의 송광사가 승보사찰이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과 이를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 건물은, 우리나라의 국보이면서 동시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의 문화(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해인사의 목조비로자나불(2점)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으로 밝혀졌다. 

  홍제암에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이 쓴 사명대사의 석장비가 수난의 흔적을 간직한 채 남아있다.

 

  해인사는 광복한국전쟁 때 위기를 맞게 된다. 1951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대한민국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퇴각하지 못하고 남은 1천여명의 북한군 잔당들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게릴라 전을 전개했다. 이에 UN군에서는 폭격기 4대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당시 공군 편대장이었던 김영환 조종사는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소실될 것을 우려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로서 해인사는 폭격당할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현재 해인사 경내에는 그를 기리는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 성철스님의 부도.  사각과 반구, 구, 그리고 원 등의 현대적인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 보물 제1242호인 해인사 길상탑.

  이 탑은 해인사의 재산을 농민반란자(초적)로부터 지키다가 전몰한 승군 56명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895년에 세워졌다.

 

** 해인사 절 입구의 일주문에서 남쪽으로 약 50m 지점에 서 있는 탑으로, 일반적인 절의 건물 배치와는 무관하게 길가에 세워져 있다. 2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구조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갖추고 있다.
  바닥돌 위에 아래층 기단을 받고, 윗면에 얇은 괴임을 새긴 후 위층 기단을 얹었다. 위층 기단은 하나의 돌로 짜여져 다른 탑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모습이다. 탑신은 1층의 몸돌이 2·3층의 몸돌보다 크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각 층 모두 5단이다. 지붕돌의 처마는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전체적으로 경쾌한 느낌을 준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네모난 받침돌만 남고 모두 없어진 상태이며, 받침돌 윗면에 쇠꼬챙이를 꽂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탑에서 나온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 중 조그만 탑이 157개가 있으나, 소탑은 원래 99개, 77개를 두는 것이 원칙이므로 19개는 없어진 듯 하다. 탑에 대한 기록인 탑지(塔誌)는 4장인데, 통일신라 후기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글에는 신라 진성여왕 8년(895), 통일신라 후기의 혼란 속에 절의 보물을 지키려다 희생된 스님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탑을 건립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전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소탑(小塔)으로, 탑지의 기록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 해인사 가는 길의 다래 덩굴.

  축대 옆에서 솟아나와 용트림을 하듯 바닥까지 닿은 뒤, 다시 공중으로 올라가고 있다.

 

 

 

 

* 보물 제128호인 반야사 원경왕사비.

   원경왕사(1045∼1114)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碑)로, 반야사의 옛터에 있었던 것을 1961년에 해인사 경내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거북받침돌과 비몸, 지붕돌을 갖추었는데, 각 부분이 얇은 것이 특색이다.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는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숙종 1년(1104)에 승통(僧統)이 되었다. 예종의 스승이 되기도 하였고 그 후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하자, 왕은 ‘원경’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비문은 김부일이 짓고 글씨는 이원부가 썼다.
  고려 인종 3년(1125)에 만들어진 이 비는, 조각기법이나 간단한 형태의 지붕돌 등에서 고려 중기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 고사목.

  해인사를 창건(802년, 신라 애장왕)할 때 기념식수로 심은 것인데, 1200여 년을 살다가 1945년에 수명을 다해 고사하였다고 한다. 

 

 

* 국사단(局司壇)

  국사단(局司壇)이란 이 토지신을 위해 마련한 건물이다. 가람을 수호하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건물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국사신앙은 불교의 정통적인 신앙이 아니라 한국 전래의 토속신앙의 대상이다. 그래서 건물의 명칭도 전(殿)이나 각(閣)이 아니라 단(壇)이다.

 

 

 

* 국사단 안에 모셔진 액자에는 '정견모주'라 쓰여 있다. 정견모주는 가야산의 산신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 :  최치원(崔致遠)의 석리정전(釋利貞傳)을 살펴보면, “가야산신(伽倻山神) 정견모주(正見母主)는 곧 천신(天神)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한 바 되어 대가야왕(大伽倻王)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金官國王)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라고 되어 있으니, 뇌질주일은 곧 이진아시왕의 다른 이름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다른 이름으로 볼 수 있다.

 

 

* 해인사의 중심영역. 대적광전과 삼층석탑, 석등이 보인다.

 

 

 

* 석등의 모습이 고색창연한데 새로 만들어 끼운 간주석이 영 어울리지가 않는 듯 하다.

 

 

 

* 이 삼층석탑의 기단부도 복원하면서 영 엉뚱하게 변해버린 듯 하다. 

 

 

* 대장경판이 보관된 장경판전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축대 및 꽃담.

 

 * 대장경판이 보관된 수다라전의 둥근 출입구.

 

 

 

* 정면의 두 칸 짜리 건물에는 팔만대장경과는 또 다른 고려각판(국보 제206호)이 보관되어 있다.

 

** 해인사고려각판(海印寺高麗刻板)

  고려시대에 새긴 불경 각판(佛經刻板). 국보 제206호. 총 28종 2,725장.

  이들 불경 각판은 이미 국보 제32호로 지정된 대장경판(大藏經板)과는 달리, 대장경판을 보관한 두 판고(板庫) 사이에 있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에서 뒤섞인 채로 해인사 잡판으로 불리어 오다가, 정리 과정에서 《팔만대장경》보다 훨씬 전에 새겨진 것이 발견되는 등 문화재로서의 귀중한 가치가 뒤늦게 인정되어, 1983년 총 54종 가운데 28종이 국보로 지정되고 26종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경판 가운데에는 고려의 간경도감판(刊經都監板)(지방관판 등 관에서 판각한 것) 이외에 해인사가 아닌 다른 사찰에서 판각한 것과 개인이 판각한 것 등이 있는데, 판각 연대는 고려 초에서 조선 후기에 걸쳐 있다.

  고려시대의 불교경전, 고승의 저술, 시문집 등이 새겨진 목판이다. 이 목판은 국가기관인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새긴 해인사대장경판(국보 제32호)과는 달리, 지방관청이나 절에서 새긴 것이다. 현재 해인사 대장경판전 사이에 있는 동·서 사간판전(寺刊板殿)에 보관하고 있다.
  후박나무를 짠물에 담가 지방기를 빼고 나무결을 삭혀 잘 말린 다음 판각하였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었다.

  이 목판에는 『금강경』, 『화엄경』 등의 대승경전과 신라·고려·중국의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들이 있는데, 경전류는 대부분 간행기록이 있어 고려시대 불교경전의 유통 등 불교신앙의 경향을 알 수 있다.

  고승이나 개인의 시문집 및 저술 등은 비록 간행기록이 없고 전권을 갖추지 못한 것이 많으나, 그 내용이 전하지 않거나 역사적으로 희귀한 자료들이다.

 

 

 

* 법보전.  가운데는 불상을 봉안하고, 양 옆에는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다.

 

 

* 호젓한 곳에 위치한 육각형 정자 형태의 독성각. 

 

 

 

* 신라말의 학자 최치원이 땅에 꽂은 지팡이가 나무로 되었다는 설화를 간직한, 수령 1200년 이상의 전나무.

  이 나무가 있는 곳을 학사대라고 하는데, 고운 최치원이 헌강왕 때 29세의 나이로 한림학사라는 벼슬을 했다고 하는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 홍제암 가는 길, 계곡 물가의 암벽을 뚫고 솟아난 나무. 나무의 강인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 홍제암에 있는 사명대사의 비석. 완전한 명칭은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석장비'이다.

 

** 사명대사는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 때 승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운 승려로, 이곳 홍제암은 사명대사가 수도하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홍제암이라는 암자 이름은 사명대사 입적 후 광해군이 내린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에서 따온 것이다.

   사명대사 석장비는 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으로, 광해군 4년(1612)에 세웠으며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비문을 지었다. 일제시대(1943년) 때, 비문의 내용이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 하여 일본인 합천 경찰서장이 네조각으로 깨뜨린 것을 1958년에 다시 접합하여 세웠다. 이 석장비는 현존하는 사명대사비 가운데 가장 먼저 건립되었으며, 문장이 매우 빼어날 뿐 아니라 비문에 대사의 행적이 비교적 소상하게 적혀 있어 역사적인 가치도 높다.

 

*** 보물 제1301호인 사명대사 비석은 사명대사 부도와 함께 일괄하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사명대사의 부도는 홍제암의 북동쪽 산기슭 조용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十자 형태로 깨진 비석의 오른편의 비석은 1958년에 복원한 것이다. 

 

**** 한편 사명대사의 출생지와 가까운 경남 밀양시 무안면에도 사명대사의 비석이 있다. 땀흘리는 비석으로도 유명한데, 해인사의 비석(보통 석장비라고 약칭한다)과 구별하여 표충비라고도 한다.

 

 

  

 

 

*** 해인사와 가까운 곳에 청량사가 있다. 훌륭한 답사코스인데, 2002년도에 청량사에 가는 도중, 길이 좁아 교행하던 중 바퀴가 도랑에 빠져서 작키로 들어올린 기억이 있어서 이번에는 답사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해인사에서 나오면서 월광사터에 들렀다. 월광사터에는 비교적 완전한 모습의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 2기가 오롯이 나무들 사이에 마주보고 서 있다. 가까이 시원한 계곡물도 흐르고, 분위기 또한 호젓하다. 절 터에는 최근에 지어진 절이 자리잡고 있다.

   

 

* 월광사터 삼층석탑 (보물 제1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