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원 대 50억원의 정의론
몇건의 판결이 세상에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 6일 서울서부지법 민사합의21부(재판장 임정엽)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 분향소 인근에서 희생자를 조롱하는 펼침막을 내걸고 유족을 모욕한 극우보수단체에 대한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다는 이유다.
9일에는 대전지법 형사항소2부(재판장 최형철)가 2018년 12월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홀로 일하다 숨진 김용균씨가 일하던 당시 원청업체 대표에게 1심과 같이 무죄를 선고했다. 1심에서 유죄였던 본부장에게도 무죄를 선고했고, 함께 기소됐던 이들도 대부분 감형해줬다.
그리고 하이라이트.
지난 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재판장 이준철)는 아들을 통해 50억원 뇌물을 수수한 혐의를 받은 전직 국회의원 곽상도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아버지를 보고 준 50억원이라는 증거가 넘치는데, 구체적인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았고, 아들이 독립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됐다.
이런 판결이 요 며칠 사이 일은 아니다.
라임 사건과 관련해 서울 강남 유흥주점에서 접대받은 전·현직 검사 네명은 모두 건재하다. 둘은 기소조차 안 됐고, 다른 둘은 무죄가 선고됐다.
권력형 범죄, 기업 범죄,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한 법의 관대함은 끝이 없다.
반면 힘없는 서민에 대한 판결은 추상같다.
지난해 11월 대법관에 임명된 오석준 판사는 2011년, 800원을 횡령한 버스기사 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한 바 있다. 50억원은 무죄고 800원은 유죄다. 이게 법이냐?
법이 강자를 편든다는 인식은 역사가 오래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 철학자 트라시마코스도 그랬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싫었다. 제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질문으로 상대의 무지를 깨우치려는 “상투적인 시치미 떼기 술법”(산파술)을 혐오했다. 올바름에 관해 대화하던 소크라테스에게 “마치 야수처럼, 혼신의 힘을 가다듬어 찢어발기기라도 할 듯이” 덤벼들었다.
트라시마코스가 말했다.
법이란 법을 만드는 사람에게서 연원하는 것이오. 지배자는 자신들에게 편익이 되는 법을 제정하고 공표하며 위반하는 자를 처벌하지요. 결국 “올바른 것은 더 강한 자의 편익으로 귀결”되고 마는 법이오.
소크라테스는 테크네(기술)의 비유를 들어 반박한다.
항해술을 가진 선장은 선장인 한 승객의 이익을 실현하지 않겠소? 의술을 가진 의사도 의사인 한 환자의 이익을 실현하지 않겠소? 마찬가지로 “그가 다스리는 자인 한은 자신에게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다스림받는 쪽 그리고 자신이 일해주게 되는 쪽의 편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하오.
플라톤이 <국가>에서 소개하는 이 일화는, 법이 누구의 편인가를 둘러싼 논란의 유구한 역사를 보여준다.
50억원 판결에 판사가 누구냐며 난리가 났다. 검사부터 문제였다고도 한다. 판사나 검사가 문제라면 사람을 바꾸면 된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법률 조항들이 문제일 수도 있다. 게으른 국회의원들을 생각하면 답답해지지만 어쨌든 고치면 된다. 사람과 법률 둘 다 바꿔야 한다면, 그래야 한다. 어쩌겠는가?
정 안 되면 인공지능(AI)도 있다. 하지만 문제가 훨씬 심각할 수도 있다. 법조인이나 법률 조항이 아니라 법 자체가 문제라면 말이다.
사실 서민의 생활세계에서 법은 본래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의 편이다. 법 자체가 강자의 무기다. 고지식한 소크라테스보다는 현실주의자 트라시마코스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트라시마코스는 법이 딛고 서야 할 정의나 올바름의 기초 같은 추상적 가치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 누가 법을 만들고 실행하느냐는 실재로부터 주장을 펼친다.
그의 주장을 이어가다 보면 놀랍게도 현대 법률과 법학의 근간이 되는 법실증주의와 만나게 된다. 이 사고방식은 오직 실재하는 법규범만 논할 뿐, 법의 기초가 되는 정의나 윤리 같은 추상적 가치에 관해서는 침묵한다.
법을 둘러싼 불평등도 외면한다. 침묵으로 강자를 편드는 논리다.
그의 논리를 잇는 또 다른 노선도 있다. 법이 강자의 편이니 스스로 강자가 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19세기 말~20세기 전반에 강한 것이 정의라는 우승열패의 사상이 팽배했다. 바로 사회진화론이다. 오죽하면 약자의 편이라는 사회주의운동조차 영향을 받았을까?
<야성의 외침>, <강철군화> 등으로 큰 성공을 거둔 미국의 좌파 작가 잭 런던이 좋은 사례다. 그에게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의 승리는 자본가계급과 자본주의보다 더 강하다는 ‘과학적 사실’에서 비롯한다.
<미다스의 노예들>(1901)이라는 작품에서는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하여 자본가들에게서 돈을 뺏는 지식인 프롤레타리아 테러조직이 등장한다. 한 자본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 이런 방법들로 당신은 살아남은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결과를 탓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도 꼭 같은 자연법칙을 인지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묻는다. 당신과 우리 중 누가 주어진 사회관계 속에서 살아남게 될 것인가? 우리 생각엔 우리가 더 강한 자인 것 같다.”
법이 힘 관계의 산물이자 강자의 도구라는 사고방식의 극단에 파시즘, 전체주의가 있다. 여기서 지배의 기술에 불과한 법은 힘 속으로 용해된다. 나치의 ‘지도자 원리’에서 지도자의 말은 모든 성문법에 우선한다. 법이 강자의 편이라고 냉소하던 이들이 이제 지도자에게 열광한다. 정치적 냉소주의와 파시즘적 열광의 뿌리는 같다.
법인류학자 알랭 쉬피오는 <법률적 인간의 출현>에서, 법을 권력에 이용되는 도구로 국한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전체주의의 특징이라고 경고한다. 이런 체제 아래서 법은 모든 구속력을 잃어버리고,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이용된다.
<전체주의의 기원>을 쓴 한나 아렌트의 통찰도 무겁다.
“전체주의의 지배로 향하는 길 위에 내딛는 필수적인 첫걸음이 바로 인간에게서 법인격을 죽이는 것”이다. 정의라는 개념 없이 법을 순수한 힘 관계 속에서 인식하는 순간 정의는 사라지고 우리는 힘의 노예가 된다.
법이 강자의 편이라고 비판하기는 쉽다. 대통령실조차 “국민이 납득하겠느냐”며 50억원 판결을 비판했다는 소식이다.
소가 웃을 일이다. 법이 강자의 편이라는 비판이 종종 냉소로, 체념으로 귀결되는 이유다.
법이 강자를 편든다고 비판하지 말자는 말인가?
아니다.
법이 강자의 편이 되게 만드는 기울어진 현실에 대한 비판이 더 절실하다는 말이다. 이 아찔한 기울기를 용납할 수 없다는 정의 감각이 절실하다는 말이다.
800원 대 50억원의 아득한 대비 속에서 새겨야 할 정의론은 바로 이것이다.
조형근 | 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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