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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원 1표’ 주주 자본주의의 허상

道雨 2023. 6. 26. 10:20

‘1원 1표’ 주주 자본주의의 허상

 

 

 

문재인 전 대통령이 최근 보수언론으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평산책방’의 책방지기로서 페이스북에 장하준 런던대 교수의 신간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를 소개한 게 발단이다.

“‘1원 1표’의 시장 논리 함정에 빠지지 않고, ‘1인 1표’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키는 깨어있는 주권자가 되기 위해, 건강한 경제학 상식이 필요합니다.”

 

1원 1표는 가진 돈의 액수에 따라 투표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시장경제의 기본틀로 불린다. 1인 1표는 모두에게 동등한 권한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 기본 의사결정 원리이다.

 

시장을 1원 1표의 자본 논리에만 맡길 경우 불평등, 빈부격차 등 적지 않은 부작용이 발생한다. 한국 사회가 시장에 민주적 통제(1인 1표)를 가미하는 경제민주화를 추진해 온 이유다. 문 전 대통령도 그런 ‘국민적 상식’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주식회사 제도를 부인하는 자기고백”, “경제가 작동하는 기본원리를 무시한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이것으론 성에 안 찼는지 “이런 비뚤어진 시각이 문 정부 5년간 민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는 악담까지 퍼부었다.

<한국경제>도 “1원 1표로 작동되는 시장을 1인 1표의 정치로 갈아엎자는 것”, “주주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고 열을 올렸다.

 

보수언론의 문 전 대통령에 대한 공격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중에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거나, 과한 내용이 적지 않다. 하지만 촛불혁명으로 태어난 문 정부가 국민의 기대에 못 미친 점, 그것이 결국 윤석열 정부의 탄생을 불러와 한국사회의 총체적 역주행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어느 정도 억울한 것은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보수언론의 비판은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 국민의 눈과 귀를 현혹시켜, 한국사회에 거짓신화가 활개 칠 위험성이 크다.

소득주도성장정책, 코로나 극복을 위한 재정 확대, 재벌개혁, 노동존중, 탈원전 등 문 정부의 주요 정책을 모두 싸잡아 1인 1표 이념의 소산이라고 몰아붙인다.

이게 무슨 억지인가?

뇌물·횡령 혐의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법의 심판을 받은 것까지 1인 1표와 연결짓는 것에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다.

 

생성형 인공지능인 챗지피티(GPT)와 바드에 동시에 물어보았다.

“1원 1표와 1인 1표 방식 중에서 어느 것이 이에스지(ESG) 시대에 부합하느냐?”

인공지능들은 입을 맞춘 듯 일치된 답을 내놨다.

“이에스지 시대에 부합하는 방식은 1인 1표입니다.”

 

환경·사회·지배구조를 중시하는 이에스지 경영이 이미 글로벌 경제의 스탠더드로 자리잡은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인공지능은 만능이 아니다. ‘편의성’이라는 달콤함 뒤에는 거짓 정보 확산, 인간 지배와 통제 등 여러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이번 답변은 논거가 나름 합리적이다.

1원 1표 방식은 돈이 많은 사람이 기업의 의사결정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이에스지가 추구하는 지속가능성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1인 1표 방식은 모든 사람이 기업의 의사결정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어, 기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투명한 지배구조를 갖추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1원 1표는 시장경제의 강력한 운용방식이다. 하지만 그 원칙이 적용된 시장경제는 우리가 꿈꾸는 사회와는 거리가 있다. 많은 국가가 이를 보완하기 위해 1인 1표 방식을 폭넓게 활용하는 이유다.

 

한국이 좋은 사례다.

1원 1표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기보다 1인 1표를 적절히 가미한 많은 제도를 운용한다.

상법은 감사와 감사위원 선임 시 대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한다.

공정거래법은 재벌 소유 금융보험회사와 공익법인이 보유한 비금융 계열사 지분에 대해서는 의결권을 제한하는 금산분리 원칙을 적용한다.

 

보수언론은 이들 규제가 다른 나라에는 없고, 경영권도 불안해진다며 반대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대주주와 경영진 견제, 소액주주 보호, 재벌의 과도한 경제력 집중 억제, 이해충돌 방지 같은 경제민주화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헌법 119조에는 경제민주화가 명문화되어 있다.

 

‘1원 1표=경제’, ‘1인 1표=정치’라는 보수언론의 획일적 이분법은, 21세기 글로벌 경제의 흐름과도 배치된다.

보수언론은 1인 1표가 1원 1표에 기반한 주주 자본주의를 흔든다고 주장한다. 손경식 경총 회장도 노동이사제에 반대하며 “우리의 주주 자본주의와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노동이사제는 대립적 노사관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자를 경영에 참여시키는 제도다.

 

조금만 눈을 밖으로 돌려보면, 보수언론과 경총이 내세우는 주주 자본주의 시대는 진작에 퇴조했음을 알 수 있다.

주주 자본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조차 2019년 애플 등 200대 기업의 최고경영자 모임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에서 주주 자본주의의 종언을 선언했다.

글로벌 경제 이슈를 선도하는 세계경제포럼(WEF)도 같은 해, 기업의 목적은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주주 자본주의와 1원 1표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글로벌 경제의 대전환을 못 보는 ‘우물 안 개구리’와 같다.

 

주주 자본주의가 물러난 빈자리에는, 직원·소비자·거래업체·지역사회의 이익까지 존중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렸다.

 

 

한국 경제계에도 이런 큰 흐름을 따라가는 움직임이 보인다.

 

대한상의는 최태원 회장의 주도로 지난해 ‘신기업가 정신’을 선포했다.

“이윤 창출이라는 과거의 기업 역할을 넘어서, 직원과 주주, 협력회사, 지역사회 등, 모든 이해관계자와 함께 발전할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이에스지 경영도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연장선에 있다. 보수언론과 경총이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이에스지를 말로만 하는 ‘이에스지 워싱’의 증거다.

 

경제계와 보수언론이 1원 1표를 주장할 자격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국회는 지난 4월 비상장 벤처기업에 복수의결권을 허용하는 벤처기업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복수의결권은 한주당 2~10개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벤처 활성화와 창업주의 경영권 안정이 목적이지만, 1주 1표라는 주주 평등주의에 어긋나고, 기업지배구조 개선에도 역행한다는 우려도 크다.

전경련은 복수의결권을 국내 기업 전반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원 1표를 주장하면서, 자본의 이익이 달린 문제에는 1원 1표를 부정하는 이중적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정부 주식이 1주도 없는 케이티(KT) 인사에 개입하고 있다. 경제단체와 보수언론이 1원 1표를 금과옥조로 내세우면서, 케이티사태에는 침묵하는 것도 이율배반적이다.

 

대런 애스모글루 미 엠아이티(MIT) 교수는 저서인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 데는 경제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나라가 어떤 경제제도를 갖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와 정치제도라면서, 정치와 경제 제도의 상호작용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상징하는 1원 1표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1인 1표는 모두 완벽하지 않다. 경제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조화와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둘 중에서 어느 하나만 절대적 가치인 양 미화하는 것은 현실에 도움이 안된다.

보수언론의 1인 1표 공격이 윤석열 대통령의 ‘문재인 때리기’에 호응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깔고 있다면 더욱 위험하다.

 

 

 

곽정수 |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