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민심

道雨 2024. 4. 16. 11:04

민심

 

 

 

 

 

 

1898년 10월29일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매우 ‘뜻깊은’ 날로 기억돼야 한다.

 

이날 독립협회는 종로 운종가 네거리 대회장에 30×60피트(약 9×18m)짜리 대형 천막을 치고, 태극기를 높이 달았다. 행사장 주변에 친 목책 안엔 약 4천명이 질서 있게 자리를 잡았고, 전국에서 몰려든 수만명의 군중이 그 주변을 에워쌌다. 참가자들이 다 함께 ‘만세’를 불렀다.

 

행사의 이름은 망국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 “일심(一心)으로 강론해 보국안민할 방책”을 찾으려는 독립협회의 관민공동회였다.

 

첫 연사는 박성춘이라는 이름의 백정이었다.

 

“이놈은 바로 대한(大韓)에서 가장 천한 사람이고 매우 무식합니다. 그러나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제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방도는, 관리와 백성이 마음을 합한 뒤에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遮日·천막)에 비유하건대, 한개의 장대로 받치자면 힘이 부족하지만, 만일 많은 장대로 힘을 합친다면 그 힘은 매우 튼튼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관리와 백성이 마음을 합하여 우리 대황제(고종)의 훌륭한 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영원토록 무궁하게 합시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는 독립협회에 대한 기념비적 저작인 ‘독립협회연구’(1976)에서 “수만명이 모인 관민공동회 개막연설을, 가장 천시받던 해방된 천민인 백정이 시작했다는 사실부터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이 현장을 가까이서 지켜보았을 가토 마스오 주한 일본공사마저, 이듬해 5월17일치 귀임 보고서에서 이 활동에 대해 “부패가 극도에 달한 한국 정계에 한조각 청량제”였다고 평가했다.

 

 

나라 잘되기 바라는 민심이 예나 지금이나 다를 리 없다.

7년 뒤 을사조약을 강요하는 일제 앞에서 거품을 물고 졸도하게 되는 한규설 중추원 의장(을사조약 땐 참정대신)은 감격한 나머지 “금일의 관민협회는 500년 초유의 일”이라며 “부강의 기초가 금일에 정해졌으니 국가를 위하여 만세를 부르자”고 말했다.

고종이 독립협회와 백성들이 제시한 ‘헌의 6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시행했다면 국난을 극복했을 수 있다.

 

 

 

지난 10일 총선에서 수많은 박성춘들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매서운 회초리를 들었다. 어리석은 지도자가 바뀌지 않을 때 나라가 어떤 꼴을 당하게 되는지, 지난 역사를 통해 너무 많이 배워왔다.

한 사람만 변하면 될 일을, 예나 지금이나 국민들이 너무 피곤하다.

 

 

 

 

길윤형 논설위원 charism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