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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익을 포기하면서 가치에 몰두하는 나라

道雨 2023. 6. 12. 09:14

국익을 포기하면서 가치에 몰두하는 나라

 

 

 

공급망 분리(디커플링)에서 위험 완화(디리스킹)로 전환인가?

미국도 유럽도 모두 위험 완화를 강조한다. 세계화로 얽혀 있는 공급망을 분리하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웠다. 그렇다고 분리 전략의 포기는 아니다. 공급망 분리라는 의지와 상호의존이라는 현실의 격차를 인정하고, 속도를 조절하는 국면이다.

전환의 과정엔 언제나 과거와 미래가, 협력과 경쟁이 섞여 있다.

디리스킹이라는 구호 밑에 감춰진 이익의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첨단산업에서는 분리를, 전통산업에서는 의존을 선택했다. 반도체와 배터리 등 전략산업에서는 중국과 분리를 목표로, 우호 동맹국 사이의 공급망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과 경제적 상호의존의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2022년 미국과 중국의 교역액은 6906억달러로 역대 최대였다. 중국은 세계 제조업 공급망에서 최대의 중간재 조달자이고 제공자이다. 미-중 무역에서 상호의존도가 높은 분야가 중간재이고, 특히 미국의 핵심 산업과 연결된 전기·기계와 석유화학, 비금속 광물 분야에서 중국과 공급망을 분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바이든 정부가 ‘중산층을 위한 외교’를 위해, 중국으로 나갔던 제조업을 국내로 다시 불러오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미국 정부는 안보로 접근하지만, 기업은 경제로 판단한다. 중국에 나가 있는 미국 기업이 인건비가 싸고 원자재 조달이 쉽고 그래서 생산비용을 줄일 수 있고, 그러면서도 거대한 소비시장을 갖춘 중국을 왜 포기하겠는가? 보조금으로 기업의 경제 이익을 상쇄하기 어렵다.

 

미국 소비재 시장의 중국 의존은 더욱 심하다. 금리를 올려 물가를 잡으려는 미국이 값싼 중국산 소비재를 어떻게 막겠는가? 중국에 중간재를 의존하는 것도 결국 생산비용의 절감을 위해서다. 공급망 분리와 물가 관리는 충돌할 수밖에 없고, 선거를 치러야 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안보 논리가 시장 논리를 이기기는 어렵다.

 

유럽은 미-중 전략경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과정에서 ‘열린 전략적 자율성’을 추구해왔다. 말 그대로 열린 개념으로, 에너지 의존도 차이에 따라 러시아 제재 참여 수준이 다르고, 산업구조 차이에 따라 미-중 경쟁 사이 위치가 달랐다.

지난해 11월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에 이어, 올해 4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중국 방문은 공통점이 있다. 대규모 기업대표단이 동행해서, 그야말로 대규모 계약을 주고받았다.

유럽은 가치가 아니라 이익을, 분리의 미래가 아니라 의존의 현실을 중시한다. 세계적인 경제위기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중국은 미국과 유럽을 분리하기 위해, 이 틈을 파고들고 있다.

 

현재 정말로 위험 완화가 필요한 곳이 바로 한-중 관계다. 얼마 전 중국의 아시아담당 국장이 한국을 방문해서, 기존 한-중 사드 합의의 중요성과 한-중 관계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전달했다. 이렇듯 중국은 위험을 경고했지만, 정부는 완화 의지가 없어 보인다.

정부와 여당, 그리고 보수언론은 ‘탈중국’이라는 이념만 외칠 뿐, 수십년 동안 쌓인 상호의존의 빈자리를 어떻게 채워 나갈지에 대한 전략이 없다.

 

공급망 재편은 장기적인 과정이다. 미국과 유럽, 혹은 다른 나라들도 현재의 이익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변화에 대응한다. 일본조차 미-중 사이에서, 미-러 사이에서 핵심 이익이 걸리면, 손해 보지 않으려 양자택일을 피하려고 한다. 우호 동맹국 사이의 공급망이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는 경쟁 관계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기업이 안보와 경제 사이에서 활발하게 소통해야 한다.

 

한-중 무역에서 구조적으로 무역적자가 쌓이고, 그것이 무역수지를 악화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는 너무 빨리 한-중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다. 중국에 진출해 있는 기업들의 속이 타들어가고, 중국산 중간재에 의존해 수출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 제조업의 상황도 빠르게 악화하고 있다. 중국과 관계 악화로 물가 관리에도 빨간불이 들어온 지도 오래다.

 

세상의 이치도, 공급망의 전환도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 살아가다 보면 수없이 양자택일을 강요받지만, 해결의 출구는 언제나 균형의 지혜다. 특히 전환기에는 유연함이 생존의 비결이다.

 

가치 외교라고?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과연 국가이익을 포기하고 가치 외교를 추구한 나라가 있을까? 이익만 추구하는 나라는 많다. 이익을 위해 가치를 선택적으로 활용하는 국가도 적지 않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처럼 국익을 포기하면서, 가치에 몰두하는 나라는 없다.

 

 

 

김연철 |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