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북은 남이 무서워 따로 살자는데 왜 우리가 위협 느끼나"

道雨 2024. 2. 20. 10:31

"북은 남이 무서워 따로 살자는데 왜 우리가 위협 느끼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인터뷰 - 무너진 남북관계]

윤석열 정부가 조장하는 '북한의 위협' 앞뒤 안 맞아

남북관계 파탄 '경제와 평화의 교환' 공식 깨진 것

지난 20년 잊고 전혀 다른 패러다임 탐색해야 할 때

민주당, 수권정당 되려면 대북 구상 준비 주도해야

DJ도 엄혹했던 1970년대 '4대국 보장' 구상 내놓아

 

"지난 20여 년의 남북관계는 잊고,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각할 시점입니다. 국책 연구기관은 정권 홍보에 여념이 없고, 민간단체는 대북 접촉 창구가 없어졌습니다. 이럴 때 야당, 즉 민주당이 나서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는 문제니까 당장 발표하지 않아도 됩니다. 총선 대비에 바쁘겠지만 수권정당으로 그러한 움직임을 보여줘야 합니다."

"윤석열 정부는 툭하면 종북세력을 운운하는데, 북한이 헤어질 결심을 내놓은 건 그동안의 교류, 협력으로 남측 문화가 유입돼 자기들 체제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서 입니다. 그걸 두고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지난 14일 서울 마포구 사단법인 한국통일협회 사무실에서 시민언론 민들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4.2.15. 김성진 기자 

 

 

 

남북관계가 길을 잃었다.

통일은 고사하고 지난 20여 년간 유지됐던 화해협력의 기대마저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북한은 일기예보용 지도에서 남측을 지워버리고, '애국가' 가사에서 한반도를 뜻하는 '삼천리'까지 삭제했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와 민족경제협력국, 금강산국제관광국 등 대남관련 기구도 없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작년 말 당중앙위 제9차 전체회의와 1월 15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라고 선언한 이후 벌어지는 일들이다.

 

이럴 때일수록 원로들의 혜안을 거듭 찾게 된다. <시민언론 민들레>가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78)을 만난 이유다.

인터뷰는 지난 14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국통일협회 사무실에서 있었다. 

 

정 장관은 북한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해 "1990년대 중반 남북 접촉을 할 때부터 품고 있던 '남측이 우리를 녹여먹으려 한다'는 의심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라며 "남쪽 문화의 유입으로 인민의 머리가 남쪽으로 돌아갔다는 판단에 방어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진단했다.

 

북한이 두 국가론뿐 아니라 두 민족론까지 내놓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차피 북한은 자기들은 사회주의 민족, 남쪽은 부르주아 민족으로 규정해 왔다"라면서 "남측과 만나려고 할 때나 민족을 내세웠지, 헤어지겠다는 지금 민족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민족도 남북이 서로 만나려 할 때 내세운 것인데, 만날 생각이 없다는 데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도 짚었다.

 

정 장관은 "남북관계를 관리할 책임과 권한을 갖고 있는 현 윤석열 정부는 관리할 생각조차 없어보인다"면서 현시점에 민주당이 나서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구상을 준비하는 작업에 나서줄 것을 당부했다.

북한이 어떤 결정을 하건, 우리는 헌법 제3조(영토조항)와 제4조(평화통일조항)에 따른 평화통일을 추구해야 하는 데다가, 실현가능한 국가정책은 결국 정당 차원에서 구상에 나서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자유의 북진정책'을 선언한 것에 대해서는 "북한을 해방시키는 북방정책을 쓰겠다는 말인데, 접점이라도 있어야 해방을 시키건 뭣하건 할 게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북한의 붕괴를 바라는 게 통일부 장관으로서 할 말이냐"고 질타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지난 14일 서울 마포구 사단법인 한국통일협회 사무실에서 시민언론 민들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4.2.15. 김성진 기자 

 

 

 

남북은 서로 필요에 의해 교류, 협력이라는 전술적 전환을 했지만, 남은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통일을, 북은 2016년까지 전국 단위의 통일(적화통일)을 당규약에 두고 있었다.

정 장관은 "헌법이나 당규약 상의 변화보다 속셈이 더 중요하다"며 "문제는 북한이 적화통일을 할 능력이 있느냐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북한이 폐기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통일 원칙과 관련해서는 "어차피 전부 김일성 주석의 생각이었고, 7.4 남북공동성명 당시 회담 대표였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심각하게 검토해서 받은 게 아니었다"며, 의미를 크게 두지 않았다.

 

 

인터뷰 일문일답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남북 두 국가, 동족 관계 부인'으로 남북 관계가 사실상 소멸됐습니다.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를 비롯한 대북 교류, 협력 단체들이 해산 수순을 밟고 있고요.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남북관계를 지휘하셨던 입장에서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습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가, 하루 평균 평양 체류 인원이 450명 안팎인 시절이 있었습니다.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지역을 제외한 숫자였죠. 한해로 따지면 16만이 넘는 남측 사람들이 평양 시내를 헤집고 다닌 겁니다. 그러한 한 시대가 온전히 저물었습니다. 남북관계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시점에 이른 것 같습니다."

 

-북한이 이 시점에 남북관계 단절을 결정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북한은 1990년대 초 나진·선봉지역 투자 관련, 남북 경제협력 논의를 시작할 때부터 '남측이 우리를 녹여먹으려고 한다'는 걱정을 했습니다. 경제만 받아들이고, 정치, 문화를 제외하려고 '모기장 이론'도 내놓았었죠. 이제는 그러한 노력이 벽에 부딪혔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6.15 남북 정상회담 후 지난 20여 년 동안 활발하게 전개된 남북 경제협력과 교류가 북한 사회를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죠. 김정은으로선 아무리 아버지, 할아버지가 시작한 교류, 협력일지라도 그 때문에 체제 위협 요소가 같이 들어왔다고 판단, ‘대남 쇄국주의’를 선택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남에서 '참수작전'과 '정권붕괴'를 말하니까, ‘밑으로부터의 혁명’(revolution from below)에 대한 걱정도 있었겠죠."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지난 14일 서울 마포구 사단법인 한국통일협회 사무실에서 시민언론 민들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4.2.15. 김성진 기자 

 

 

-김정은 위원장이 체제 수호 차원에서 내린 방어적인 결정이라는 말씀이군요.

 

"남측 자금과 물품이 들어가면서 북한에선 장마당이 활성화됐습니다. 처음엔 남측 물건의 상표를 떼고 팔았지만, 숨겨두다가 손님이 '아래쪽 물건 있소?'라고 물으면 내놓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남측 드라마와 영화 CD도 같이 들어갔죠. 인민의 머리가 남쪽으로 돌아갔습니다. 젊은이들이 남쪽 노래를 따라 부르고, 말투와 옷도 흉내를 냈죠. 이게 김정은으로서는 위협이었을 겁니다."

 

-"녹여 먹는다"는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요.

 

"1998년 4월 베이징에서 비료회담 남측 수석대표로 1주일 동안 꼬박 오전, 오후 회담을 했습니다. 비료 20만t을 지원하고 가을에 이산가족 상봉을 하려고 했는데, 북한이 비료만 받고 이산가족 상봉 사업은 못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실패한 회담이 되었죠. 북측 전금철 단장은 그 3년 전 김영삼 정부 시절 쌀 회담도 같이했던 이입니다. 회의록에 안 들어가는 한담 시간에 그가 불쑥 묻더군요. '우리 구면인데 솔직하게 물어봅시다. 김대중 대통령이 들고나온 햇볕론의 본심이 뭐요. 남측 외교안보수석(임동원)이 TV에 나와 햇볕을 비춰 우리 외투를 벗긴다고 하지 않았소?'라고요. 제가 '6.25전쟁 때문에 남쪽 여론은 북쪽을 좋지 않게 본다. 그런 식으로 말해야 그나마 대북 지원을 지지할 게 아닌가'라고 응수하니까, 그는 '본심은 우리를 녹여 먹으려는 거 아닌가?'라고 되묻더군요. 비료지원과 이산가족 상봉을 맞바꾸자고 제안하니까, '거, 주는 사람만 자존심이 있는 게 아니고, 받는 사람도 자존심이 있는데, 우리더러 항복문서 도장 찍으라는 말이오?'라며 반발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있었던 의심이 김정은 시대에 되살아난 것 같습니다."

 

-'햇볕(Sunshine)정책'은 빌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인게이지먼트(Engagement) 정책'을 의역한 것 같습니다. 평시엔 대화, 전시엔 교전을 뜻하는 말로 원래 가치 중립적인 개념인데, '햇볕정책'이라고 부르면서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연히 그리 됐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연설에서 대북정책을 소개하니, 미국 언론이 'sunshine policy'라고 보도를 했죠. 일본은 '태양정책', 중국은 '양광(陽光)정책'이라고 했습니다. 누군가 햇볕정책의 아이디어를 주었을지 몰라도 처음 사용한 건 미국 언론이었습니다."

 

-남북관계 20여 년을 총평하신다면.

 

"통으로 보면 경제협력과 군사적 위협 완화를 교환하자는 거였습니다. 김영삼 정부의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했던 시절 우리가 설정한 목적도 바로 그거였습니다. 북한 경제는 1970년대 남한에 뒤지기 시작, 중국의 개혁-개방 탓에 1980년대 제로성장을 시작했습니다. 1985년부터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개방), 페레스트로이카(개혁)가 나오면서 199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죠.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는 대신 군사적 도발이나 위협을 막기 위한 틀을 짜려고 했습니다. 외형상의 문제는 클린턴 행정부의 북폭 우려였지만, 사실 그건 미국이 흘린 이야기였습니다. 거기에 겁먹은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에 호응, 미국에도 퇴로를 열어준 거죠. 김일성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정상회담이 성사되지 못했지만 이후에도 같은 구조였다고 봅니다. 김일성은 묘향산 특각에서 남북정상회담에 앞서 실무자들을 불러 들여 준비하다가 북측 경제의 실상을 알고 격노해서 쓰러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지난 14일 서울 마포구 사단법인 한국통일협회 사무실에서 시민언론 민들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4.2.15. 김성진 기자 

 

 

-처음부터 경제와 평화의 교환이었군요.

 

"북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일성 사후 발견된 문서로 사망 8일 전인 1994년 6월 30일 '벨지크(벨기에) 노동당 대표단과의 담화'가 있습니다. 김일성 전집에 수록된 문서죠. 거기에 김일성이 '남쪽이 중국, 소련과 수교하더니 철도 연결하자고 하더라. 남측 대통령이 오면 그걸 제안할 텐데, 실무자에게 물어보니 우리가 받을 철도 통행료만 한해 15억 달러가 된다고 하더라. 내가 그걸 왜 안 하겠나'라고 말한 대목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동독에 고속도로를 깔아주고 통행료를 받게 했던 서독 정책을 참고했습니다. 그해 김일성이 죽고, 북한은 이듬해부터 '고난의 행군'을 겪었습니다.

1998년 등극한 김정일 위원장도 남쪽 경제의 힘을 빌려 자기네 경제를 살리겠다는 입장을 정했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의 정상회담 제안을 받았을 겁니다. 6.15 공동선언의 제4항이 '민족경제의 균형발전'이지 않습니까. 경제지원을 한다고 표현하지 않았기에, 북한도 자존심 안 상하게 됐죠. 햇볕정책 이후 금강산 관광을 시작하고 개성공단도 건설했습니다. 자재, 장비를 건네 철도, 도로도 연결했죠. 그런데 그 와중에 남쪽의 문화가 같이 들어간 겁니다."

 

-경제와 평화의 교환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때까지 유효했던 틀이었던 것 같습니다. 2011년 말에 등극한 김정은 위원장 시대에는 어떠한 의미 있는 경협 사업도 없지 않았나요? 그가 강조한 것도 기억이 안 나는군요.

 

" 2018년 문재인 정부 들어 정상회담을 두 차례 하고 남북관계가 좋을 때, 북측이 북한지역 철도의 현대화(고속철도화)는 제안했죠. 그러나 이 전처럼 경제적 지원을 요구한 적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김정은은 이명박 정부 때 금강산 관광이 끊긴 뒤 등극했습니다. 남아 있던 개성공단도 박근혜 정부 때 철수했습니다. 북이 안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남쪽 정권 탓에 닫힌 거죠. 남측에서 몇 푼 들어오는 데 엄청난 자본주의 황색 바람이 따라왔다는 생각을 북측이 한 건 꽤 오래된 것 같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2012년 4월 15일 첫 대중연설에서 "더 이상 인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2018년 북미 정상회담 즈음에는 핵, 미사일 개발하는 동안 '인민이 겪은 고생의 대가를 한꺼번에 받아내겠다'고 했죠. 두 말을 연결해 보면 푼돈이 아닌 큰돈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김일성(1962)과 김정일(1999)도 '기와집에서 비단옷 입고 이팝(쌀밥)에 고깃국 먹고 살게 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궁핍을 벗어나려는 '인민들의 세기적 염원'을 기어코 달성하겠다'고 했죠. 김정은의 허리띠 발언은 같은 말을 간략하게 줄인 것이자, 경제난을 일거에 해결하려면 남북 경제협력으로는 안 된다, 큰 걸 해야 한다, 대미 관계 개선해서 세계은행이나 아시아개발은행에서 자금을 들여와 단박에 발전하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이나 중국, 일본 자금을 받으면 남쪽 문화가 따라오지 않는 장점도 있습니다. 돈에도 색이 있다고 하지만, 남쪽 자금에는 '독'까지 묻어있다고 본 거죠."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지난 14일 서울 마포구 사단법인 한국통일협회 사무실에서 시민언론 민들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4.2.15. 김성진 기자 

 

 

-북한이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 담긴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을 기어코 철거한 건 충격이었습니다.

 

"어차피 3대 헌장(조국통일 3대 원칙-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은 죄다 김일성의 생각이었습니다. 남북이 7.4 공동성명에서 발표한 3대 원칙인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도, 회담 대표였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별다른 검토 없이 받은 겁니다. 북측 대표가 '수령님이 꼭 넣으라고 한 거다'라고 강하게 주장하니 그냥 받은 거죠. 깊이 따질 이유도 없었습니다. 공동성명 자체가 미중 데탕트 와중에 서로 국내 정치적 목적에서 한 거였지 않습니까.

이후 남쪽은 유신헌법을 만들었고, 북도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해 주석제를 신설했죠. 공동성명 2~3년이 지나자, 북쪽은 '자주=반미, 평화=남북의 합의로 통일, 이를 위해선 민족대단결=주한미군 철수 및 국가보안법 폐지'로 의미를 달리 선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이 '적대적인, 두 국가론'뿐 아니라 '두 민족'을 주장했다는 해석(강인덕 초대 통일부 장관)도 있습니다. 당장 ‘민족’ 하나 끌어안고 살아온 총련이 뒤집혔다고 합니다.

 

"총련으로선 정체성의 문제가 생겼을 겁니다. 북한의 정치용어사전을 보면, 북쪽은 사회주의 민족이고 남쪽은 부르주아 민족이라고 규정해 놓았습니다. 자신들은 '태양 민족' ‘김일성 민족’이라고도 하죠. 어차피 남북이 서로 만나려 할 때나 민족을 내세웠지, 만날 생각이 없어졌는데 민족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민족’은 이제, 철기 시대가 왔는데 청동기 시대, 석기 시대 용어를 쓰는 것과 똑같은 게 됐습니다."

 

-남북 화해협력과 연합을 거쳐 통일로 가는 3단계 통일방안은 한국전쟁과 이후 시대를 겪은 세대가 1980년대 말(1989년)부터 구상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게 11년 뒤인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으로 첫발을 내디딘 거죠. 당장 남북관계 재개 가능성이 없다고 해도 새로운 구상을 시작해야 할 때가 아닌지요.

 

"바로 그래서 제가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본 겁니다. 당장은 윤석열 정부의 반북 소동 탓에 북쪽이 남측을 제1의 적국이라고 하고, 우리 자재 장비로 연결했던 철로를 끊었습니다. 하루, 이틀에 복원될 관계가 아닙니다. '복원' 자체가 틀린 말입니다. 남북대화가 다시 열린다고 해도 '과거의 남북관계'를 복원하려고 한다면 첫 단추부터 끼우지 못할 겁니다. 호흡을 길게 잡고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건 먼저 지난 20여 년간의 남북관계를 잊는 겁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지난 14일 서울 마포구 사단법인 한국통일협회 사무실에서 시민언론 민들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4.2.15. 김성진 기자 

 

 

 

-당장 실행계획은 어렵겠지만, 개념이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엄혹했던 1970, 1980년대보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까. 정부나 관변 연구기관만 바라볼 게 아니라, 민간연구소도 있으니까요.

 

"남북관계를 관리할 책임과 권한을 갖고 있는 현 윤석열 정부는 관리할 생각조차 없어 보입니다. 민간단체가 나서려 해도 북측 민족화해협회나 6.15선언실천위원회 북측본부, 범민련 북측본부 등 창구가 없어졌죠. 통일연구원을 비롯한 국책 연구기관은 정권 생각을 정당화하는 당면 과제 탓에 한눈을 팔기 어렵습니다. 큰 그림을 다시 그리는 작업은 기대하기 어려워요. 민간 차원에서 통일을 꿈꾸는 분들은 불행히도 구름 위에 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국가 전체로 보면 꿈꾸는 분들도 계셔야죠. 그러나 국가 정책을 준비하려면 실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정당이 나서야 할 시점이라고 봅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먼 훗날 집권에 대비해서 1970년대에 '4대국 보장론'과 같은 구상을 내놓지 않았습니까?"

 

-정당이라고 하시면, 민주당을 말씀하시는지요.

 

"그렇습니다. 국책 연구기관과 민간연구소의 중간 지대가 정당인 거 같습니다. 정권 홍보에 여념이 없는 이들과 꿈꾸는 분들의 사이의 중간에 있는 게 정당이죠. 정책은 결국 정당이 만들어야 합니다. 수권정당이라면 집권 뒤 대북정책을 어떻게 가져갈지 복안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지금 발표하지 않아도 됩니다. 평양에 들어가는 길이 막혔으면 베이징이나 워싱턴을 돌아 들어가든지, 도널드 트럼프 당선 뒤 미-북 정상회담이 열리면서 우리가 제외될 상황을 막을 대책을 마련하든지, 이 모든 걸 정당 차원에서 모색해야 합니다. 지금은 총선 준비에 경황이 없겠지만, 윤석열 정부와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움직여야 하고, 그 움직임은 공개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움직임이 보이지 않아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고 표를 기대하는 건 나무에서 생선을 찾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일 겁니다.

북한이 뭐라고 하건, 우리는 헌법 제3조(영토조항), 제4조(평화통일)를 준수해야 합니다. 땅덩어리를 짊어지고 이사를 갈 수도 없고, 어차피 북한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북한이 ‘두 국가론’을 내놓은 뒤 윤석열 정부는 4월 총선과 연관시키면서 북한이 대남 도발을 할 것이라는 경고를 잇달아 내보내고 있습니다. 신원식 장관은 "북한이 4월 총선을 앞두고 대남테러를 벌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툭하면 종북세력을 운운하더군요. 디올백도 공작 차원에서 한 거라고 하구요. 그런데 체제 단속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위협을 느끼는 건 북한이 아닙니까. 남쪽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대북 공작이 무서워서 철저히 문을 걸어 닫고 두 국가로 살자는 건데, 거꾸로 된 이야기가 아닙니까? ‘같은 민족이니까 언젠가 통일을 해야 한다’라는 말을 막기 위해서 단속에 나서지 않았습니까?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김여정 당중앙위 부부장은 남쪽 정권이 보수건, 진보건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추구했다고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동안 민족을 말했지만,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통일(헌법 제4조)’을 포기하지 않았듯이, 북한도 그동안 전술적으로 남북 협력을 해 왔더라도 적화통일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유지하지 않았을까요?

 

"북한은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 때 당규약을 고치면서 ‘전국적인 범위에서 통일을 완수한다’는 말을 없앴습니다. 적화통일을 없앤 거죠. 그때 이미 남남으로 살 생각, 즉 헤어질 결심을 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헌법이건, 당규약이건 그대로 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도 뭐, 헌법대로 움직입니까? 자유민주주의라고 써놓았지만, 자유민주주의 아니잖아요. (웃음) 속셈이 중요한데, 문제는 북이 적화통일을 할 능력이 있느냐는 거죠."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최근 '자유의 북진정책'을 선언했습니다. "북한 내부에 우리가 원하는 변화가 일고 있다"면서 체제전복을 기대하는 말도 내놓았죠. 통일부 장관은 정부조직법(제31조)에 따라 통일과 남북대화, 교류, 협력에 관한 정책을 수립하는 자리가 아닌가요?

 

"아니, 지금 대한민국이 헌법과 법률을 지키는 나라입니까? 시행령으로 법률을 뒤집는 사람들인데…. 자유라면 영어로 프리덤(freedom) 아니면 리버티(liberty)인데, 리버티라면 북한을 해방시키는 북방정책을 쓰겠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접점이라도 있어야 해방을 시키건 뭣하건 할 것 아닙니까. 개인적으론 김 장관과 일면식도 없습니다."

 

-1월 8일 역대 통일부 장관 신년 하례식에 참석하지 않으셨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일부러 안 간 게 아닙니다. 통일부 실무자가 사전에 연락해 와 8일과 9일 중 9일을 선택했고, 실무자도 '다수가 좋다고 하시니 9일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라고 말했죠. 그런데 행사 전날 갑자기 8일로 결정했다고 전해왔습니다. 오비이락인지 제가 김 장관을 공개 비판한 뒤 날짜가 바뀌었습니다."

 

-어떤 비판이었나요.

 

"냉전 시대 조지 케넌 소련 주재 미국 대사의 말을 인용해, '북한은 태엽 감은 장난감 자동차처럼 벽에 막혀 결국 멈춰 설 것'이라고 했더군요. (김 장관은 2일 통일부 새해 시무식 인사말에서 케넌이 소련에 대해 한 말을 북한에 적용하면서 소련이 해체됐듯이 북한도 붕괴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그런데 소련과 미국 사이에는 태평양이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과 붙어 삽니다. 북한이 멈춰 서면(붕괴하면) 비무장지대는 물론 동해와 서해로 탈북민이 내려오고 난리가 날 겁니다. 대체 어디서 배웠는지, 통일부 장관이 그걸 말이라고 했느냐고 비판했습니다."

 

 

 

 

 

정세현 장관 약력

정세현 장관은 1945년 5월 만주국 싼장성(三江省) 자무쓰에서 태어난 해방둥이다. 마오쩌둥의 대외전략을 연구한 학자로 출발, 1977년 국토통일원에 공산권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이후 27년 동안 남북관계 일선에서 활약했다. 김영삼 정부의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1994년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했고,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 연이어 통일부 장관을 지낸 남북관계의 산증인이자 주역이다. 참여한 남북대화만 95차례에 달한다.

2004년 통일부에서 은퇴할 때까지 1971년 적십자 회담 이후 남북이 체결한 143개 합의 가운데 73개가 그의 장관 재임기간에 이뤄졌다.

이후 민족화해범국민협의회 대표 상임의장과 원광대학교 총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부총리급)을 역임했다. 현재는 사단법인 한국통일협회 회장으로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국제정치 사상의 뿌리라는 점에 착안해 42년 전에 출간했던 <모택동(마오쩌둥)의 국제정치사상>을 새로 쓰고 있다.

 

 

 

 

김진호 에디터gino777@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