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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동족’은 아니라 해도 적이 될 필요야…

道雨 2024. 2. 21. 09:09

남북, ‘동족’은 아니라 해도 적이 될 필요야…

 

 

 

최근 석달 동안 북한 지도자 김정은은 남북관계와 관련된 몇가지 충격적 발언을 해왔다.

이미 지난해 연말 그는 “북남관계는 적대적 두 국가 관계”라며,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일노선과는 전혀 다르게, 여태까지 북한이 애써 부정해온 “두개의 조선론”을 시인했다.

나아가 지난달에는 북한 민족사에서 “대결광증 속에 동족의식이 거세된 대한민국 족속들과는 민족중흥의 길, 통일의 길을 함께 갈 수 없다”며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대남 관련 업무를 수행해온 각종 기구를 정리했고, 심지어 ‘삼천리 금수강산’ ‘8천만 겨레’처럼 북·남을 동족으로 상정하는 용어들까지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북한 정권이 처음부터 “국토통일”을 일차적인 국정과제로 삼아온 사실을 상기해보면, 이는 사상이 곧 생명인 북한 사회에서 일종의 ‘사상혁명’에 해당한다.

 

도대체 이 북한 지도자는 왜 한국과 영구히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됐고, 앞으로 나라 살림을 어떻게 꾸려나갈 생각일까?

 

 

남북 사이 ‘영원한 이별’을 발표한 배경에는, 지금껏 남북관계사에서 얻게 된 나름의 쓰라린 경험, 한국 사회 안에서의 사상적 변화, 그리고 향후 세계정세 예측까지 세 요인이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이 세가지 요인들을 하나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15 남북공동선언’ 등 햇볕정책은 장밋빛 미래를 약속했지만, 그 경제적 결과물은 초기의 기대에 비해 초라했다. 남한 대기업 가운데 대북 경제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현대그룹이 유일했는데, 현대그룹의 금강산관광 사업은 계속 적자 행진이었다. 개성공단의 경우도 대기업들의 참여는 별로 없었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남한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 임금은 한달 약 150달러였다. 이는 북한과 같은 정치적 부담이 없는 방글라데시나 캄보디아보다 다소 높은 편이었다.

 

 

장기적인 ‘민족 공동의 경제 만들기’ 전망보다 당장의 단기 수익이 더 중요시되는 신자유주의 시대, 남한 자본의 입장에서 위험 부담은 크고 수익은 제한적인 대북 경제협력은 그렇게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민족” “통일” 같은 단어들이 거창하게 들렸지만, 남북관계 경색이 본격화된 2010년 이미 북한의 대외무역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중국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으며, 둘 사이 격차는 계속 커지는 중이었다.

신자유주의 시대 한국 자본은 지속가능한 남북경협 모델 만들기에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반면 국가 주도의 중국 자본주의는 북한을 자원 및 상대적 저임금 노동 제공국으로 비교적 순조롭게 그 영향권에 편입시켰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동족의식이 거세된 대한민국 족속”은 꽤 거친 표현이지만, 사실 북한 지도자 처지에서 보자면 한국 관료집단이나 정치권에 화가 날 만도 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대북 경제협력 정책을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폐기하는 등, 남한에서는 정책의 장기적 일관성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2010년대부터 한국의 강경보수는 점차 뉴라이트 일색이 되어갔다. 뉴라이트들이 보기에 김정은의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투쟁 대상이었던 일제는 한반도에 자본주의 문명을 심어준 ‘은인’이고, 시장자본주의와 친미 노선을 거부해온 북한은 ‘절대 악’이다.

 

 

뉴라이트 색깔이 강한 현 남한 정권은, 민족영웅 격인 홍범도 장군까지도 공산주의 이력을 들어 낙인찍을 정도로 한치의 이념적 관용도 없다.

한편 대북관이 비교적 온건한 자유주의 정치인들도, 미-중 대결이 깊어지는 상황에서는 대개 미국 진영 소속 의식이 확연해지고 행동반경도 좁아진다. 문재인 정권은 초기에 정상회담 등 대북관계 개선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결국 비핵화 중심의 미국 의제에 눌려 실질적인 협력을 거의 하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강경 우파가 뉴라이트로 변질하고 자유주의 세력들이 소심해지는, 전체적으로 보수화되는 한국에서는 특히 젊은 층에서 북한이나 통일에 대한 인식 자체가 희미해진다.

지난해 한국여론평판연구소 조사에 의하면, 20~30대의 67%가 가장 좋아하는 나라로 미국을 꼽았고, 61%는 통일이 꼭 필요하지 않다고 답했다. 북한에 대한 비호감도는 88%에 달했다.

자본가나 관료뿐만 아니라 이미 자신을 ‘제1세계 부자나라 국민’으로 인식하는 다수 한국인에게, 북한 문제는 더는 관심 대상이 아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북한 지도부의 ‘이별 통보’(?)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가?

 

북한이 남한과 이제 완전히 길을 달리해도 된다고 결심한 배경에는, 그렇게 해도 외롭지 않으리라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현재 북한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그리고 친이란 세력들이 중동에서 각각 미국 내지 친미 세력들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싸우고 있다고 낙관하고, 나아가 중국·러시아·이란 등 유라시아 열강과 미국 등 서방 사이 갈등이 장기화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장기 갈등에서 북한이 중국·러시아·이란 등과의 관계 속에서 필요한 자본, 투자, 기술, 그리고 관광객들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래서 남한과 헤어져도 살림을 꾸려나가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으리라고 보는 것 같다.

 

위에서 분석한 것처럼,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는 김정은의 대남 발언들은, 여태까지 남북관계의 흐름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종합적 평가이자, 한국이 없는 북한의 미래를 제시하는 장기적 전략이다.

 

하지만 이제 남북이 더는 서로 통일을 모색하는 동족이 아니라고 해도 굳이 적이 될 필요는 결코 없다.

김정은이 말한 “적대 관계”는, 일차적으로 한·미·일 군사공조에 모든 것을 걸고 대북 접근을 사실상 포기한 윤석열 정권의 정책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책은 결국 언젠가 수정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남한 정권은 대북관계 정상화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좁은 한반도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남과 북은, 서로의 차이, 이제 돌이키기 어려운 서로의 이질화를 인정하고, 설령 “영구히 헤어졌다” 해도 서로 싸우지 않는 좋은 친구로 지낼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